내 뒤에서 (Behind Me)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0)

 

때에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 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 도다 하니” (3:12)

 

 

내가 먼저 보지 않고는 전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먼저 듣지 않고는 전할 것이 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체득하지 않고는 남들에게 전할 것을 알 수 없다.

내가 먼저 경험하지 않고 남들에게 전하는 것은 가짜다.

 

무엇인가가 내 뒤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이 있는 지점을 지나왔다는 말이다. 성경의 예언은 앞일을 미리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듣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하는 자에게는 이미 예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할 전달자에게 예언(말씀)의 내용을 반드시 미리 학습시키신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학습하게 될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것이 바로 그걸 말한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지나봐야 성경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정황은 성경 곳곳에 널려있고, ‘지혜를 구하는 자들즉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말씀을 깊이 깨닫기를 원하는 선택받은 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 경주를 이미 시작하고 있다(12:1).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엉망으로 되었는지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벧전 4:12) 그 사람은 십자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 같은 강제적 사건이나(요나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 같은 행운(그의 십자가 형벌이 동시에 주의 십자가가 되었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헌신과 사모함, 혹은 열정을 가지고 그 십자가의 세계에 첫 발을 들인다.

 

성경에서 그 흐름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수수께끼 풀이(14; 28:20-21) 혹은 감추어진 보물찾기(13:44)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잘 모른다. 아니,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어도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진심으로 원하지 않았기에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다.

 

이런 말이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우습게 보일 것이다. ‘고난이라니! 예수 믿는 자에게 심판이라니! 세상의 영광과 능력의 맛에 취한 자들은 알 수가 없다(4:1-10).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고 잘 되어야 한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속고 있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알 수 없다(7:15; 24:11,24). 또 롯의 아내(19:26)처럼 십자가와 상관없는 문제들에 정신 팔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

 

[물론 세월호 사건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안됐고, 작금의 여러 문제들에 잘 대응 못하는 정치, 행정권 인사들은 비난 받을 만하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누구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생각할 문제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문제들에 얽매여 눈에 불을 킬 정도라면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에 한 번 당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 위기를 절감한다. 외부의 문제들은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지금 물에 빠져 죽고 있는데 서울시청광장에 나갈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대통령이 내가 얻을 면류관보다 더 중요할까? 다른 일들이 중요하게 보이고 그것들에 집중할 정도면 십자가는 나와 관계없다는 증거다.]

 

지성소에 발을 들여 놓으라. 그러면 내 뒤에 있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1:10).

감동도 중독된다 - 남들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Moving Addicted, to whom making others touched

 

TV, 라디오, 영화, 인터넷, 자기계발서 등에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감동적인 이야기는 라디오방송의 애청자 사연이다. 선택되어 방송이 된 사연을 제공한 청취자에게는 선택되었다는 명예와 함께 선물이 제공이 된다. 그런 당첨과 선물을 노리는 청취자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는 이야기들 가운데 당첨의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꾸며낸 감동이야기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SNS에서 좋아요클릭과 칭찬과 격려의 댓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건조하고 논리적인 내용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감동이야기를 많이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떤 글이나 동영상을 보고 감동했기에 주변에 소개하기 위해 공유하는 정도의 순수한 나눔의 의도였지만, 몇 번 그런 경험이 반복이 되면 더 좋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동영상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감동이야기 중독의 증상이다. 심한 경우는 감동이야기를 자신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창작물도 있고, 외국의 것을 편집한 것들도 보인다.

 

그런데 설교에 있어서도 꾸며낸 감동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성경 본문은 꾸며낸 이야기가 될 수는 없지만 예화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가짜 예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를 들기 위한 예화인 경우, 이솝 우화나 영화 같은 꾸며낸 이야기를 예화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청중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부분의 예화는 실화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설교자도 감동적인 예화 찾기에 중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감동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꾸며낸 가짜 예화를 사용하는 실수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Fiorello La Guardia, 1882-1947) 뉴욕 전()시장의 감동적인 재판 이야기이다. 한국의 교회들에서는 그가 뉴욕 시장이 되기 전에 전직 판사라고 과장까지 섞여서 소개가 된다. 어쨌든 그가 빵을 훔친 가난한 노인을 유죄로 판결하면서 10달러 벌금을 물게 하고 그 노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한(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했다는) 시민들도 책임이 있다면서 즉석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어 모금을 하여 그 벌금을 내게 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것이 아닌데 지금도 강단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예화 중의 하나로 사용이 되고 있다.

According to ‘Try and Stop Me’ by Bennett Cerf, La Guardia often officiated in the municipal court. He handled routine misdemeanor cases, including, according to Cerf, that of a woman who had stolen a loaf of bread for her starving family. Cerf states that he insisted on levying a fine of ten dollars, then said "I'm fining everyone in this courtroom fifty cents for living in a city where a person has to steal bread in order to eat!" He passed a hat and gave the fines to the defendant, who left the court with $47.50. There is, however, no convincing proof of this anecdote. http://en.wikipedia.org/wiki/Fiorello_H._La_Guardia

 

The Boiled Frog

 

끓는 물속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즉시 뛰어 나오지만, 개구리를 차가운 물에 넣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그 속에서 죽는다는 유명한 예화도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개구리는 물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지면 빠져 나온다.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할 예화가 만일 꾸며낸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그 예화를 이용해 전하고자 하는 성경말씀의 교훈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설교자는 예화를 주로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얻기 때문에 그 예화가 꾸며낸 이야기인줄을 본인도 모른다. 설교자 자신이 끓는 물속의 개구리의 전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화를 들은 누군가는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혼자 웃고 마는 것으로 끝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Reformed Preachers Society 09

The Thing More Important Than the Interpretation

성경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

 

성경말씀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설교자는 낙제다. 그의 설교가 교리적으로 틀리지는 않겠지만 교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교리는 설교의 방향과 지침은 될 수 있을지언정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The preacher fails if he makes sense of the Scripture in a doctrinal way. Although his sermons are not wrong, they are not able to jump up the doctrines. The doctrines may be the directions and guidelines but they never make people touched and changed.

 

성경말씀을 휴먼 감동 스토리나 자기계발서로 착각하는 설교자도 낙제다. 영적인 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If he understands the Scripture as moving stories or self development books, he also fails. Because he has no idea about spiritual aspect.

 

성경해석은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The interpretation has a very important place in preaching.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있어서 100%의 정확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설교자 자신의 성경관과 인생관이 변화하기도 한다. 성경을 대하는 설교자의 영적 수준이 점차 변화하기에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해석도 어떤 일부에서 문제점이나 오류가 발견이 될 수 있다.

However, no preaching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ecise interpretation (Cf. 2Pet. 1:20). Passing time, the preachers are changed in their view points about life and the passages. And changed spiritual standards, also changed their interpretations. Even there might be wrong interpretations in the some works of Augustine and Calvin.

 

그러므로 해석의 옳고 그름은 설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완벽한 해석을 할 수 있을까?

Therefore it is not absolute to judge between right and wrong in the Bible interpretation. Who is absolutely able to interpret the Bible except God, the true author?

 

올바른 해석은 아닐지라도 본문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와 내용이 좋은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약간의 해석상 오류가 있는 설교라도 용인(사용)하시는 것 같다. 훗날 또 다른 기회를 통해 더 좋은 해석에 이를 수 있도록 설교자를 훈련하고 인도하신다.

You may preach a misinterpreted sermon which has a good intention and contents. In that case it seems that God admits and uses the preaching in His way. He trains and leads the preacher to be better afterward.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조차 그 목적을 갖고 계신다. 해석과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확신하는가?

God even has a good purpose for human error. Importance is for interpretation and insight, and more importance is for which the preacher should be in God's Hand. Are you sure where you are?

...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8
... For unto whomsoever much is given, of him shall be much required: and to whom men have committed much, of him they will ask the more.
Lk. 12:4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전도서 1:18
For in much wisdom is much grief: and he that increaseth knowledge increaseth sorrow. 
Ecclesiastes 1:18

지혜를 많이 깨달은 자는 그 받는 고난도 많다.
The more wisdom, the more trials.


God’s not dead.

He’s truly alive.

Christ’s tomb is empty.


And in the wilderness, where thou hast seen how that the LORD thy God bare(יִשָּׂא; נָשָׂא) thee, as a man doth bear his son, in all the way that ye went, until ye came into this place. Deut.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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