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med Preachers Society 01

 

The Third Listener

 

윗필드나 스펄전 같은 천부적인 천재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어떻게 자신의 설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학생들의 설교는 그래도 약간의 교정의 기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직 목사, 설교자는 어떻게 할까? 신학교의 방학학기를 이용한 특강이나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미나, 그리고 독서 등을 통한 자기 계발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통해서 확실히 변한 설교자가 있던가? 많이 다니고 많이 읽기는 했는데 변한 것은 거의 없다. 신학생의 설교 능력은 그가 은퇴할 때까지 동일하다.

 

문제는 어떤 설교자도 자신의 설교가 남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치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청중들도 자기 목사의 설교를 평하는 것을 무슨 신성모독으로까지 생각하는 것 같다.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동일시하는 것 같다. 물론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은 깊은 관계가 있다. 교회 역사와 전통을 볼 때, 설교라는 제도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이 공급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허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설교를 통해 신자는 많은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목사도 인간인 이상 인격뿐만 아니라 설교에서도 인간적인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설교를 당신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그러하기에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에 더욱 겸손하고 자신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도록 설교를 위한 자신의 인성과 영성의 발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발전한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 게시글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좋아요클릭과 칭찬하는 댓글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고 나아가 찬양해주는 팬들을 끌고 다니고 싶기 때문이다. 불행이지만,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설교에 팬이 있기만을 바라지 평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는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들은 주인으로부터 언제나 사랑만을 받기 바란다. 그 존재의 이유가 주인의 장난감이기 때문이다. 장난감이라는 표현은, 애완동물을 자식 같이 키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하는 말이다. 설교자가 애완동물처럼 칭찬만을 듣고 사랑만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은 절대 발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서서히 나태해져 가는 자신을 영원히 발견하지 못한다.

 

악의적이고 저급한 수준의 댓글이 아니라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도 그 평가가 제대로 자신의 약점을 말하고 발전 방향을 가르쳐 준다면, 설교자는 그 평가를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런 수준의 설교자를 찾아볼 수 있을까? 자신이 한 나라에서 설교의 황제로 불리고 수 천 명의 교인들이 매일 은혜 받았습니다하고 자신을 왕처럼 떠받드는데 그런 비평을 받아들일만한 목사가 있을까? 그런 비평을 받아본 적도 없을 것이다.

 

목사들은 자신의 설교를 들어주고 평가해 줄 수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한 사람의 청중이다. 이 청중은 너무 찬양일색이어도 너무 반골일색이어도 곤란하다. 청중 중에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감상을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한 사람을 고르라. 그리고 말로 하지 말고 문자나 메일로 평을 해달라고 부탁하라. 대면해서 직접적으로 평을 할 수 있는 신자는 없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많다면 그 한 사람의 청중을 정기적으로 바꿔가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좋다.

 

둘째는 목사의 부인이다. 보통 목사의 부인들은 보수적이어서 목사 남편 찬양일색이다. 남들에게 자신의 남편을 비평할 수 없다. 그러나 속까지 과연 그럴까? 목사 부인은 자신의 남편의 설교준비 상황과 인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에 그런 면에서 설교의 분위기 변화나 장단점을 가장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청중이나 목사 부인으로부터의 설교 평이 사실 제대로 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들이 처음에는 한두 번 평할 수는 있지만 계속적일 때는 아무래도 인간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가능하면 그들을 유지하면 좋겠지만 제대로 완벽한 객관적인 평을 받을 수는 없기에 가장 좋은 설교 평가자는 그 셋째로서, ‘제 삼의 듣는 자’(the third listener)이다.

 

제 삼의 듣는 자는 설교자의 교회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되 설교를 평해줄 수 있는 신학과 신앙의 안목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사람은 비디오나 오디오 자료를 통해 정기적으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평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정밀하게 들어줄 정말 좋은 청자를 가져야 한다. 어떤 설교자가 그런 용기가 있을까?

 

유명한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끔 자신의 설교평을 듣는 때가 있다. 출판기념회나 회갑잔치 같은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평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찬양이지 비평이 아니다.

 

설교의 목적이 비평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설교가 제대로 된 비평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당신의 교회가 속으로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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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할 때는 설교자와 청중 간의 영적 교감이 있습니다. 제가 종종 설교하다가 어떤 성도를 바라봤을 때 뭔가 막히고 있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가 너무 어려워도 듣는 사람들이 이게 뭘까? 뭔가 있는 것 같은데?’하고 관심을 기울이면 내용이 좀 어려워도 설교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해도 설교에 반대하는 어떤 기운이 일어나면 무슨 커다란 댐에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단 눈빛이 설교자를 거부합니다. 피곤해서, 지루해서 졸릴 수도 있습니다. 조는 것은 별로 신경이 안 쓰입니다. 저 사람 언제 말씀이 귀에 들어가 확 깰까 하고 잠간 잠간 신경 쓰이는 정도?

 

하지만 팽팽하게 신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설교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애들 훈계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과 같습니다. 사실 설교에 저항하는 느낌은 그 이상으로 강하게 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한 사람이 있으면 점점 그 분위기가 퍼져갑니다. 반대로 은혜 받는 분위기가 되도 퍼져갑니다. 영적인 분위기란 참 묘합니다.

 

한 사람이 은혜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은혜가 파문처럼 퍼져 나가고,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를 누군가 만들면 전체는 아니더라도 부분, 부분 빨간 불 켜지듯 전염됩니다. 참 신기하죠. 미리 짜고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거부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설교자의 인격과 관계된 문제가 첫째인 것 같습니다.

 

처음 만난 설교자에 오히려 은혜 받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설교자의 인격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잘 아는 설교자에 대해서 역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설교자의 인격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때로 그 사람의 모자란 구석과 부족한 인간성을 보았기 때문에 설교를 그 설교자의 인격에 연관 지어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입장에서도 청중의 입장에서도 해결하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설혹 설교자가 작은 교회 목사라서, 이름 없는 목사라서 설교도 별 볼일 없을 것으로 선입관을 갖고 있다면 그처럼 큰 실망은 없습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의 인격과 교양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설교의 내용 때문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설교가 어렵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가 방언이 아닌 이상 아무리 어려워도 알아듣고 은혜 되는 부분들이 중간 중간 툭툭 튀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짧거나 신앙문제에 대하여 고민의 과정을 적게 겪은 분들은 제 설교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나가면 복 받으러 가는 거고, 교회에 가기 어려운 이유가 헌금 때문인 분들은 분명히 어렵습니다. 아직 거듭남의 문제를 해결 못한 경우입니다.

 

제가 초신자나 불신자를 위한 전도설교, 구원설교도 종종 하지만 주로 하는 설교는 성화와 자람에 대한 설교입니다. 그렇더라도 대개 초신자인 분들은 성화에 대한 설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거부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과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 설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거듭났다 하더라도 신앙에 대해 고민한 일이 적은 분들은 제 설교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혹은 제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물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한 번 여행해보십시오. 믿음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진지해야만 구원 받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면 마치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열심히 믿는 것과 믿음이 자라는 문제는 다른 세계입니다. 아이들도 열심히 믿고 당연히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으로 평생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믿으면 구원! 그리고 그 다음에는? ...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됩니다. 자칭 보수적이라는 한국 교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은 당연히 율법적인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단 한 권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많은 경건서적들, 신학서적들이 구원 이후의 삶과 성화의 문제들을 다루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이 한 번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영적 전투를 싸워보지 못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이라 자신부터 이해가 안 됩니다. 설교할 때 기껏 성화의 문제를 십일조 잘해라, 주일 잘 지켜라, 새벽기도 잘 나와라, 아브라함 닮아라, 바울 닮아라로 결론 맺습니다. 설교자 본인이 고민과 생각이 부족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들이 그 찬란한 빛을 드러내기를 원하며 숨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성경 속에서 발견한 보화들을 여러분께 충실히 전하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듣고 받아들이는 분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제가 사람인 이상 실수로 설교 중에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상하게 하겠습니까? 설교자를 통한 성령님의 음성일수도 있습니다.

 

제 설교를 영적으로 거부하는 경우는 물론 제가 인간이 못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설교하는 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마시고, 제가 전하는 말이 진리일까 하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성경말씀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렇게 연구한다면 제 설교와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게 될 겁니다.

 

제 설교가 지금까지 여러분이 생각하고 경험하신 말씀의 세계관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거부하지 마시고, 신앙의 양심으로 성경과 비교하고 기도하여 여러분이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권고합니다. 제가 이단적인 설교자가 아닌 이상 제 설교를 들을 때에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옳다고 인정하시면, 그다음, 여러분의 인격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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