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Your Ability

 

It is not our abilities that show what we truly are, it's our choices. Dumbledore

우리가 정말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선택으로 하는 일이란다. (덤블도어 교수가 해리에게 분류의 모자의 그리핀도르 선정에 대해 물어보는 장면)

Movie: Harry Potter, THE CHAMBER OF SECRETS

It is our choices, Harry, that show what we truly are, far more than our abilities.

 

 

장사에 있어서 목은 장사의 절반이다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절반이 아니라 90%”(여보게 지금 음식 장사하려나, 김요한, 미래와 경영, p.13)라고 까지 할 수 있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성패를 결정한다면 그 일이 음식 장사든 교회든 전략적 위치는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된다.


교회가 신흥 대단위 아파트단지 부근의 버젓한 단독 건물이나 임대라도 상권이 좋은 빌딩에 있다면 일단 부흥 가능성이 많다. (요즘의 교회 부흥은 기존 신자들의 수평 이동이다.) 그렇다면 그 부흥의 원인이 교회를 개척한 목사의 실력과 노력인가? 만약 그가 한적한 구도심 뒷골목이나 상가의 지하에서 시작했어도 같은 결과를 얻었을까?

 

착각하지 말자

 

좋은 목을 고르고 비싼 건물을 임대할 수 있는 것도 목사의 능력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은혜인가? 목 좋은 교회의 부흥의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그렇지 못한 개척 교회에서 고생하는 목사들에게 죄송하므로(그들에게는 은혜가 없다는 오해도 가능하니) 하나님의 은혜라고만은 할 수 없다.


좋은 목을 가진 건물에서 개척해서 성공한 것은 대부분 그 목사들의 능력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다른 일들도 성공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설교 잘해서 부흥한다고 착각하지 말자. 그들은 단지 좋은 선택을 했을 뿐이다.

 

하나를 잘하자

 

그 작은 성공과 부흥이 어디까지 될 수 있을까? 계속 끝없이 성공할 것 같고 발전할 것 같은가? 목사의 성공 욕심으로 이것저것 손을 대다보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장소와 목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한계점이 짧아졌다. 그러나 목회의 가장 기본인 말씀과 설교에 전부를 건 목사의 교회는 좀 더 오래 지속 가능하다.

 



1.

Shishak and Shoshenk

Moving backwards in time, the second pillar17 involves the following Biblical passage: [II Chronicles 12:9]

"So Shishak king of Egypt advanced on Jerusalem and carried off the treasures of the Temple and

the treasures of the royal palace. He took everything away, including the golden shields which

Solomon had made."


In 18 the fifth year of Rehoboam, who was the son of Solomon, Chronicles tells us of the successful

campaign of Shishak, king of Egypt, against the cities of Judah. After taking many of Rehoboam‟s fortified

towns, Shishak reaches the gates of Jerusalem and demands Rehoboam‟s capitulation. His price for not

razing Jerusalem to the ground is to strip the palace and temple of Solomon of all its treasures, taking them

to Egypt. From the description of this event, we reach our first „confirmation‟ of an event in Israelite history

from external sources.


This was first related to Egyptian chronology by Jean-Francois Champollion. Six years after he deciphered hieroglyphs, in19 1828 Champollion first visited Egypt. He stood beneath the monumental inscriptions of the temples and tombs and was the first person in perhaps 2000 years to read the utterances of Pharaohs and the gods directly from the very walls themselves. Champollion looked at the triumph scene of King Hedjkheperre Shoshenk I, cut

into the walls of the Karnak Temple. He recognized the faint outline of the Pharaoh – wearing the tall white crown of Upper Egypt, with raised right arm and, in his fist, the royal mace poised to crash down upon the heads of bound captives at the center of the smiting scene. On the other side of the wall stood the regal god and goddess of Karnak, both of whom were dragging towards the king tethered rows of oval name-rings surmounted with the heads of captive chieftains. The hieroglyphs inside the rings spelled the names of cities captured by King Shoshenk during his Year 20 military campaign into Palestine.


Champollion read the city names: Aijalon, ... Gibeon, Mahanaim, ... Bethshan, Shunem, Tanaach, Megiddo – all familiar from the Old Testament. He came to name-ring 29 and read the signs: y-w-d-h-m-l-k. He vocalized the consonants (the ancient Egyptians did not write vowels): Iouda-ha-malek – „Judah‟ (Heb.Yehud), followed by „the Kingdom‟ (Heb. ha-malcûth). Had Pharaoh Shoshenk conquered the Kingdom of Judah? Indeed! Champollion was delighted to have found a crucial chronological link between the events of the Bible and the history of the Pharaohs. From that moment on, Shoshenk I, became identified with the Biblical King Shishak. This event – according to Biblical chronology – was datable to the first half of the 10th century BCE, and is conventionally given the date 925 BCE.


The names Shoshank and Shishak

You can read on your own how Shishak could be the same name as Shoshank.




http://sedersforyou.tripod.com/Egyptian.seder.leader.guide.pdf



2.

Other identifications have been put forward which have been considered fringe theories. In his book Ages in Chaos, Immanuel Velikovsky identified him with Thutmose III. More recently, David Rohl's New Chronology identified him with Ramesses II, and Peter James has identified him with Ramesses III.

http://en.wikipedia.org/wiki/Shishak

http://www.northforest.org/BiblicalArchaeology/shishak.html



Reformed Preachers Society

 

06. Decrease preaching

 

설교자들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How much time do preachers spend preparing a sermon? (http://thomrainer.com/2013/06/22/how-much-time-do-pastors-spend-preparing-a-sermon/)

1~3 시간: 1%, 4~6 시간: 9%, 7~9 시간: 15%, 10~12 시간: 22%, 13~15 시간: 24%, 16~18 시간: 23%, 19~21 시간: 2%, 22~24 시간: 0%, 25~27 시간: 1%, 28~30 시간: 2%, 31~33 시간: 1%.

 

미국의 목사들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3시간이라는 비공식적인 통계(트위터 투표)가 있다. 물론 미국의 교회들은 한국에서처럼 새벽기도회가 없다. 서구의 개혁교회들은 보통 주일에 1~2회의 예배와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주중 예배가 있다. 그러니 설교 횟수가 많아야 주 3회 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설교하는 횟수는 10회 이상이 40.2%, 그리고 평균 설교 횟수는 7.5(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159)라고 한다.

 

10회를 만약 13시간씩 준비한다면 130시간(5.4)이 걸린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설교 준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한국의 목사들은 사실 제대로 된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1. ()을 푼다.

Just talk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2. 다른 설교를 인용하거나 아예 통째로 베낀다.

요즘 표절 문제가 많이 거론 된다. 설교 표절로 목사를 비난하는 진정한 이유는 설교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실은 교인들에게는 권위적이고 세상 영광만을 좋아하는 그 목사의 인격과 행동이 싫은 것이다. 감정적이고 내적인 부분을 공론화하기는 어려우니, 논문 표절이 범죄로 취급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내가 비난하기 원하는 목사의 설교를 거론하는 것이다.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42.195km를 자신의 다리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달린다면 사기다. 먼저 앞서 간 선수의 뒤를 갈지라도 노력과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달려야 자신의 기록이 된다.

 

설교자가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고신대 김대진 교수,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159)

 

설교에 있어서 인용과 짜깁기의 범주를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록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더라도 성령의 감동하심과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녹이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설교의 탄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스펄전, 윗필드, 피니, 무디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인용해서 재탄생 시키는 것은 오히려 설교자들이 거쳐야 할 수업 과정이다

 

3. 설교를 줄인다.

담임 목사의 설교 횟수를 줄이고 다른 보조 목회자들이 설교하도록 해야 한다. 목사들이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교인들이 담임 목사의 설교만을 듣기 원하는지 솔직한 답을 물어본 적은 있는지? 그리고 새벽기도회를 예배가 아닌 설교 없는 기도회로 해야 한다. 담임 목사의 설교 횟수만 줄여도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설교 표절 문제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설교자가 위의 셋 중 어느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표절도 어느 정도 가능하고 횟수를 줄일 수도 있지만 제발 첫 번째인 'blah-blah-blah'는 하지 말기를!

"A bishop keeps on saying at the age of eighty what he was told to say when he was a boy of eighteen, and as a natural consequence he always looks absolutely delightful." (Oscar Wilde, The Picture of Dorian 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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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Cast Away Preachers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가 있다. 비행기 사고로 인한 4년간의 무인도 생활과 무인도 탈출 후 사회에 돌아왔을 때 주인공이 겪는 고독함을 그렸다. 너무 충격적이고 몰입이 대단한 영화였다. 주인공은 항공 배달물인 윌슨 배구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마치 친구처럼 혼자 대화한다. 그런데 뗏목으로 탈출하던 중 폭풍에 배구공이 날아가 버리고 주인공은 처절히 “I'm sorry, Wilson"을 외친다. 그리고 겨우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아이까지 낳았다. 자신은 이미 죽은 것으로 장례까지 끝났다. 주인공은 자신의 무인도 생존에 도움이 된 배달물을 보냈던 사람의 집을 찾아서 빈 집에 쪽지를 남기고 돌아가는 길에 황량한 벌판의 사거리에 홀로 서있게 되면서 엔딩한다. 이 영화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데 결국 인생은 혼자만 남더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설교자가 고독하다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 설교자가 만일 찬양받는 인기 설교자라면 틀린 말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절대 고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전하고 그 자신이 십자가의 삶을 사는 설교자라면 그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듣기를 원치 않고 따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이 되고, 부모형제간 화평하게 되고...” 이런 말들을 꺼내는 것이 부끄러워야 한다. 그런 사람이 고독을 느낀 사람이다.

 

지혜란 남들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진리이다. 그리스도가 ’(지혜를 구하는 모든 자)만을 다루시고 경험하게 하는 절대 고독이다. (Cf. Prov. 9:13-16; Lk. 4:24)

 

설교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투옥이나 죽음이 아니다. It is to be betrayed and cast away. 그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고통을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2Ti 1:15; 4:10,15,16; 3Jn 9,10). They are those who see their bodies lied in the street. (Rev 11:8)




 

04. A Betrayed Preacher

 

If you are betrayed by your close one, it is a very natural happening.

 

And ye shall be betrayed both by parents, and brethren, and kinsfolks, and friends; and some of you shall they cause to be put to death. (Lk. 21:16)

 

Who killed Abel? Who persecuted Isaac? Who sold Joseph into slavery? They were their own brothers.

 

Who sent John the last apostle of Jesus into Patmos? It wasn't Romans or Jews. Perhaps it was his own spiritual brothers as Jesus was sold by His disciple.

 

I John, who also am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ribulation, and in the kingdom and patience of Jesus Christ, was in the isle that is called Patmos, for the word of God, and for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Rev. 1:9)

 

And who killed Jesus? It wasn't Jews or Romans. It was you and me, His own brothers!

 

If you are betrayed by your close and loved one, it shows you are His disciple and you are a companion, and in the kingdom and patience of Jesus Christ for the word of God as a pre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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