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8. 구원 얻는 믿음①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35부터 5장 마지막 절까지 마가는 주님의 능력에 대해, 메시야의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31~41에서는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자연에 대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5:1~20에서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건에서 우리는 사랑받을 수 없는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우리도 또한 사랑받을 수 없는 세상의 자식들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5:21~43에서는, 질병을 고치시고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병자가 같이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죽어가는 딸을 위해 등장하고 예수님을 모시어 가는 중에 길에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자가 나타나 믿음으로 치료를 받고, 그 와중에 자기 딸이 죽고, 그리고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네 가지 사건과 이적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사람의 상황이 극한적으로 몰려있을 때에야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음과 같은 간절한 문제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연의 위험, 마귀의 지배, 질병과 사망의 고통 속에 처하여 있는 몇 가지 상황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상황입니다.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을 알고계시고 그 상황 속에 계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우리가 만나는 일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 그 지역 사람들의 배척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들은 자신들에게 진정 중요하고 생명이신 당사자를 피하고 싶어 하고 당장의 이익과 피해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건너 오셨을 때 가버나움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5: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한 사람이 예수님께 뛰어와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의 지도자이며 장로인 야이로라 했습니다. 그 지역 유지입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경과 신임을 얻은 사람이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 온 종교적 명성, 사회적 명망을 다 버리고 한 젊은이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문제는 12살 난 딸이 병으로 고생하다가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산으로도 그의 인맥으로도 그는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12살의 딸자식이라면, 그야말로 자식 키우는 때 중에 가장 기쁘고 사랑스러울 때입니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딸의 재롱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행복이 확 사라지고 이제 가장 고통스러운 자식의 죽음을 앞에 놔두고 있는 부모의 심정은 찢어질 듯합니다. 아마 대신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것이 모든 정상적인 부모의 마음일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아무 희망이 없을 때에 야이로는 자신의 회당에서 얼마 전 큰 사건을 일으켰던 한 청년이 다시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기도 했고, 손 마른 자를 치료하기도 했고, 근처 마을에서 어느 여인(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많은 병 고치는 이적을 행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부터 들었고 보기도 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회당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아니면 율법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면 그때는 딸의 병이 없어서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배반자라고 비난할지라도, 회당장의 직분에서 물러나게 될지라도, 야이로는 자기가 지금까지 본 대로 이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가서 간절히 구하면, 그가 자기의 가장 큰 문제를, 딸을 고쳐줄 것으로 가대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혈루병 걸린 여자가 등장합니다. 요즘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이란 X염색체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원래 생물학적으로 여자는 걸릴 수 없는 병입니다. 현대의학에서 말하는 혈루병(증)은 상처에서 피가 나면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혈루병은 그런 혈루병이 아니고 요즘 말하는 여자의 자궁출혈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든 남자든 출혈이 발생하면 레위기 15장에서는 그 사람이 부정하다하고 7일간 사람과의 접촉을 금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게도 합니다. 그러데 이 여자는 12년을 계속적인 출혈로 인하여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인 접촉이 종교적으로 금지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만지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같이 불결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여자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재산을 허비하고 오히려 병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5:25~26,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그래서 그 여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공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무리 속에 숨어 있다가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계획을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5:27~28,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12년을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여기 두 가지의 12년이 있습니다. 하나는 야이로가 경험한 12살 난 딸의 행복한 12년입니다. 그러나 그 12년도 이제 질병과 죽음으로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혈루병 걸린 여자가 경험한 12년의 고통의 세월입니다. 물론 더 오래 그 병을 짊어지고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괴로움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내온 시간입니다.
한 사람의 어린 소녀는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12년의 행복을 보냈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죽음 같은 12년의 오랜 세월을 억지로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12년을 너무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이 한 순간의 장면에 드라마틱하게 두 사람의 너무 다른 인생이 절망이라는 끝에서 한 사람 예수 앞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각자 다른 시간들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동시대를 만났고,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을 떠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를 지라도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서로 만났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분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라는 분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얽혀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문제를 주님께 드리는 믿음으로 지금 나와 있다면, 바로 이 자리가, 바로 이 교회가, 주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셨다는 믿는, 승리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상식적으로 정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내가 엎드러짐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교회에 나가겠다, 무엇이 없어서 못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런 삶과 신앙의 한계를 넘어보지 못한 수준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투정만 하여야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몇 달 전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2시간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한양공대 대학원까지 다닌 분이고 강사까지 하셨고 미국에서 몇 년 생활까지 하신 70이 가까우신 분입니다. 컴퓨터와 전자보안관리 시스템까지 경험과 지식이 꽤 있는 분이 지금은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어느 교회에서 관리집사직을 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관리직이라는 것이 큰 교회에서는 자기 맡은 전문만 담당하면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중소규모 교회들에서는 크고 작은 궂은일을 다해야 하고 일 잘하면 아무 말 없고 실수하면 말 많은 직업이 관리직입니다. 그렇다고 노동에 비해 보수가 대체로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이 처음에는 순수하게 일을 시작했다가 여러 자존심 상하는 일들을 당했습니다. 다른 집사님들로부터, 교회 교역자들 심지어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통해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답니다. 가끔 저하고 마음을 터놓는 이야기를 해서인지 제가 그 교회를 떠나고도 전화가 왔습니다. 말하자면 제게 화풀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그냥 듣기도 하고 그렇게 2시간을 통화하다가 마지막에 제가 한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면서 화가 납니다.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더욱 조심해야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눈에 뜨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나를 그 교회로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런 믿음의 성장의 상황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잘나서 그 문제의 해결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이 내가 망치와 모루에 두들겨 맞고 뜨거운 불맛, 차가운 물맛 보면서 연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곳 외에는 나 같은 인간이 단련 받아 성장할만한 곳이 더 이상 없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교회가 그 연단의 장소입니다. 교회가 좋은 면만 내놓고 멋있게 찬양하고 멋있게 설교 듣고 앉아 있다가 헤어지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이 더 잘 해냅니다.
대형교회들이 전도 안 해도 사람이 몰리고, 인기 있는 이유가 그 이유입니다. 부담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헌금, 봉사, 준만큼 교양 있게 대접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신약서신들의 교회 어디에도 그런 교회가 기록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문제 많은 인간들이, 때로 서로 말 많고, 상처를 주고, 지지고 복닥거려도 그래도 주님만은 붙들겠다는 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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