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니는 것은 휴일의 피크닉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음악과 듣기 좋은 심리치료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감히 받으실 수 없는 무시와 치욕을 받으신 그 영적 전쟁에, 여러분은 그의 제자로서 참여했다는 선언이 이 예배입니다.
마가복음 19. 종의 전쟁
마가복음 3:20~30,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본문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친속들의 오해
마가복음 3: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친속들’이란 가족들, 친척들 그리고 고향 친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이 미친 줄 오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부러 그럴 수도 있습니다. 대개 정상인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경우는 어떤 사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심각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변명을 할 때도 사용됩니다. 요즘에는 병역기피를 위해 가짜로 정신이상자 노릇을 한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변호해주지 않았고 그래도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께 도움이 되지 못한 모양입니다. 설령 변호를 했더라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너, 메시야 콤플렉스에 빠졌구나!” 이것이 예수님께 대한 가족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도 가족과 고향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 오해를 받았을 것이고,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입장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38,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만일 우리가 예수를 섬기기를 원하고 따르기를 원하면 그분이 가신 갈보리 길과 고난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2. 서기관들(바리새인들)의 훼방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라 악의에 찬 훼방입니다.
마가복음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런 언행을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시고 그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29~30,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그들은 그리스도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악령에 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세불(붑)이란 에그론(Ekron)에 거주하던 블레셋 사람들의 신의 이름입니다.
열왕기하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바알세불은 ‘똥파리 대왕’이라는 뜻이고 ‘사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고 바로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완악한지를 보여줍니다.
‘훼방(毁謗)’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훼방(blasphemy): 남을 헐뜯어 비방함. 또는 그런 비방.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 모독죄입니다.
마태복음 12:32,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거스려 말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1) 구원 받은 성도의 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죄가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사 53: 롬 5:18~19).
로마서 5:18~19,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의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죄들을 다 용서받습니다. 그 결과 성도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되어(롬 8:34),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는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히 10:14).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합니다(요 5:24).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원한 생명이란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 받은 성도는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2) 가라지 같은 사람의 죄입니다.
‘성령훼방죄’는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6:4~6,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런 사람은 전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 동안 교회생활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성령의 생각이고 무엇이 성령의 사역인지를 분별할만한 능력을 얻은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들 속에 섞여 있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마치 성도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를 하거나 스스로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훼방죄’는 참 성도나 전혀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3)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훼방죄’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죄와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막 3:28~29).
훼방이란 해치거나 방해를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는 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4) 고의적(故意的)인 죄입니다.
사람은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과거에 ‘훼방자’였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께서는 바로 이어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도리어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주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딤전 1:13~14).
디모데전서 1:13~14,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훼방죄는 용서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성령훼방죄’는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범한 죄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임이 분명합니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임하여집니다(행 3:19).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회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어떠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롬 2:5).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성령의 훼방죄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고난이 두려워서 한 순간이나마 주님을 부인하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6)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어려운 죄입니다.
어떤 경우가 ‘성령훼방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크고 중해 보이는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용서 못하실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가 아무리 막중할지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베드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죄(바울), 의도적인 간음에 살인을 더했던 죄(다윗),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명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했던 죄(요나) 등 모든 죄가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고 ‘성령훼방죄’임에 틀림이 없다는 속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장차 베드로, 바울, 다윗, 요나처럼 회개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이와 같이 진리를 듣고 보았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한 사건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리지 같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과 철학이 옳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때로 그들이 종교적인 권세를 가지고 의로운 자들을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요 그들의 인생의 목적은 참된 신자와 제자를 연단시키고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반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제자들의 신앙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의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휴일의 피크닉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음악과 듣기 좋은 심리치료를 들으려고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감히 받으실 수 없는 무시와 치욕을 받으신 그 영적 전쟁에, 여러분은 그의 제자로서 참여했다는 선언이 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해와 모독을 당하신 것처럼 그런 오해와 비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고난을 선택한 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종으로서 섬기고 그 고난을 견디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려면 그가 받으신 무시와 치욕을 받는 전쟁에 당연히 참여해야 합니다. 때로 아픔과 오해가 있더라도, 여러분 보다 먼저 모든 것을 견디시고 또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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