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전달자

하나님은 설교자를 자근자근 다져 놓으신다. 그 다져진 상처 중의 하나로 청중의 상처와 만나게 하신다. 그것이 설교자와 청중이 하나되는 유일한 통로다. 그 설교자가 진정한 말씀의 전달자이다.

설교자의 외침이 왜 허공에만 울리는가? 이 상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南山玄豹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 부스스 얼룩덜룩하던 털이 내면이 충실해지면서 어느 순간 빛나는 무늬로 바뀐다.

 


마가복음
 
04. 종의 시험

 

마가복음 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광야고난 이야기 중 세 가지 시험과 그것을 이기신 내용까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광야 기록이 가장 짧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가가 게을러서였을까요? 아니면 어떤 다른 뜻이 있어서였을까요? 아마도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마가복음이 다른 두 복음서처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자세한 내용에 마음이 빼앗겨 마가복음이 가장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에 집중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 되심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분의 종인 우리들이 유혹과 시험도 또한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종이심을 보이려고 먼저 세례 요한이 그것을 예비하였고 그분을 나타내는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도 비둘기처럼 내려오셔서 그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가장 분명하게 그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로 가셨다는 말씀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구약의 대표자로서 세례 요한, 하늘의 성령님과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말씀하면서 또한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또한 고난 당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도 또한 광야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가장 영적으로 영광 받으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  혹은 즉시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바로 그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중심이 아닙니다. ‘사건이 중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으시자마자라는 뜻입니다. 가장 좋고 은혜롭고 기쁜 상태가 나타나자마자 예수님은 광야로 가셨습니다.

 

세례의 영광과 광야의 시험 사이에 아무 간격이나 쉼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9장에는 산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화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마가복음 9: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라고 하시고 이후 얼마 안 있어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33~34,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성령은 예수님의 세례 직후 곧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의 하나님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있자마자 사탄의 사악한 미소가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 종종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두 발짝 뒤로 가는 것 같아.” “마치 산을 올라가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복을 경험하면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곧 이어지는 그 다음의 시련에 부딪치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은혜와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갈멜산의 좋았던 교제와 하늘 영광의 감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거친 광야와 십자가 고난 같은 경험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하면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떤 보상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혹을 이겨낸 승리의 간증들이 본인과 다른 신자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이 우리의 안전과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요셉조차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으나 그 대가는 감옥행이었습니다.

 

성경은,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고난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겨내는 영적 승리보다 때로 실패와 고난을 통과한 은혜가 신자에게 영적 유익과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게 보이는 장면인 세례와 갈멜산 정상의 사건 이후에 고난의 길을 직접 가시거나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은 성령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가복음 1 12절에서 우리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마가복음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εκβαλλει)

 

몰아내다라는 말로 사용된 단어는 ekballo[to eject, bring forth, cast (forth, out), drive (out), expel, leave, pluck (pull, take, thrust) out, put forth (out), send away (forth, out)]입니다.

 

같은 장면을 묘사한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이끌림을 당했다는 수동태인데,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행동하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두 가지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마태와 누가는 성령께서 가이드를 하셨다는 말씀이고 마가는 강제적으로 추방했다는 말입니다.

 

ekballo라는 단어가 다른 장면에서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마가복음 1: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마태복음 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같은 단어가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 성전을 청결히 하실 때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을 때처럼, 그리고 성전의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으실 때처럼, 성령은 예수님을 강제적으로(강하게) 광야로 내보냈습니다.예수님에게 대하여 성령님이 주장하셨고 예수님은 그것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으로서 시험을 받으셔야 했고 그 시험을 이기셔야 했습니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긴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신 첫 번째 종이 되셨습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신자인 우리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6:6)으로 선택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결국 승리할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도망치도록 허락받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맞닥뜨리되 이미 승리한 싸움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광야에서 승리하셨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시험과 유혹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난과 그리스도인의 삶과의 관계는 우리가 늘 경험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쓰러지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경험으로 더 복된 영광에 참여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 형제들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4~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이긴 자만이 원수를 가까이 초대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모진 세월의 고난을 주셨지만 결국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그가 총리가 되어 세상이 말하는 성공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난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F.B. 마이어라는 미국의 유명한 성경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책을 찾던 중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은혜는 마치 높은 책장에서 책을 찾듯이 위를 향할수록 은혜가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책장의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내가 몸을 굽힐수록 더 큰 은혜가 있었다.”

 

4세기의 가이사랴 지방의 주교였던 바실(St. Basilius, 330~379, Basil of Caesarea)이라는 분은 두통으로 늘 고생을 하던 중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두통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두통이 없어지자 마음속에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그 두통을 다시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는 변화산 정상에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계곡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지금 고난의 계곡에 갇혀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고난의 계곡 가운데서 무릎 꿇어 본 분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를 내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고난을 은혜로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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