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2, “현숙한 여인” אשׁת־חיל
몇 년 전, 기도할 때 방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그런 은사를 추구하는 경향도 없고 방언은사를 달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방언이 나왔습니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두 단어가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오는 대로 영어 알파벳을 적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몰타라는 작은 섬나라의 언어였습니다. 물론 그 뜻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그 나라 정부기관에 문의했습니다. 영어로 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친절하게도 답장이 왔는데 그 뜻이 ‘성실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 뜻을 알고 나서 저는 약간 실망을 했습니다. “방언이라면 그래도 뭔가 대단한 뜻이 내포된 것이어야 할 텐데 남자인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라니….”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의미로는 당시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실한 여자 집사님이 필요한 건가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또 방언을 한 것도 잊어버리고 약 3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종철형님네 가족과 저희 가족이 유성 계룡산 수통골에 갔을 때(2011년 5월 7일), 종철형님이 제게 묻기를, 제가 아내와 의견이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여자들, 드보라와 에스더를 인용했습니다. 제 의견은, 하나님은 남자들이 무력한 비상시에, 지금의 저처럼 남자가 가장 노릇을 잘 못할 때 여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언의 마지막이 ‘현숙한 여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신앙적 격언집인 잠언의 결론으로서 현숙한 여인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갑자기 ‘공동체 운동’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촛불을 켜놓고 약 2시간 넘게 글을 썼습니다. 그런 글을 쓰면서도 글 내용과는 약간 다른 방향의 영감도 쏟아졌는데 그것으로 룻기의 기본 맥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의 히브리어 원어(에셋 하일, אשׁת־חיל)의 뜻은 ‘여자 용사 혹은 힘센 여자’입니다. 싸움을 잘하는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살림을 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잠언에 왜 ‘현숙한 여인’이 마지막 부분에 놓였는지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했던 단 두 단어의 방언의 의미도 비로소 이해되었습니다. ‘성실한 여자’가 바로 ‘현숙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룻기 강해를 했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룻기의 의미가 열렸습니다. 룻기는 한 가정의 구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병들어 죽은 전 남편 말론의 이름의 뜻은 ‘병약한 자’입니다. 새 남편 보아스는 ‘강한 남자’라는 뜻입니다. 병약한 남자의 아내였던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인간의 비정상적인 죄악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함으로 여자가 머리 노릇했던 가정이 남자가 머리가 되는 가정으로 회복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와 우주의 머리로 회복되는 구속사적 시야를 우리에게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잠언에 현숙한 여인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유는, 잠언의 존재 자체가 진실한 지혜를 구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지혜의 근본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대망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숙한 여인, 즉 성실한 여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바탕을 이루어 나갑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사나 여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때는 비상시였습니다. 그들의 등장과 믿음의 행위들이 놀랍고 대단하지만 그 자체가 불완전한 상태를 말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본적인 제도와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시고 그들에게 남자들을 뛰어넘는 영광과 능력의 기회들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의 지도력으로 상징되는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죄로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의 지도력이나 능력으로 구원이 나타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한 가정사에서부터 세계를 흔들만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성들이 활약하는 일을 통해, 인간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성을 쓰심으로 인간들이 강하다고 착각했던 남성성 즉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게 하셔서 인간 자체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치자이신 왕중왕,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구원자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질서의 개념으로, 그리고 구속사의 개념으로 가정과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을 찾기 바랍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는 그 남편이요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 권세와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만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완벽한 남자요 영원한 신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70년대 이후, 성장과 부흥이 한국 교회들의 목표였습니다. 공격적인 부흥회, 전도집회, 무슨 운동, 국내외의 대형 교회 벤치마킹 등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남성적 성향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최종 결과물인 한국의 교회들의 지금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영적 능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부정적 요소들이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이런 현상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선택하는 교회의 기준을 목사의 학력과 인지도, 그리고 교회의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외적 수준으로 자신이 평가 받기를 원하는 열등감과 교만함에 빠져있습니다. 대부분 그 신앙환경 속에서 자신들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명목상의 신자로서 출석과 헌금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최면을 걸고 살 것이고, 교회들도 그들이 현재의 물질적 수준을 보장해주는 무언의 약속 속에서 문제점을 묵과하고 같이 병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병이 결국은 교회들에게 재앙을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문을 닫고, 큰 교회는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을 꾀는 이단과 그릇된 가르침들, 특히 다원론적 종교관이 도리어 그러한 영적 공황상태의 틈을 비집고 더 극성일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대안은 의식 있는 소규모 교회와 공동체 운동입니다. 대형화와 성장위주의 교회가 남성적이라면, 말씀에 입각한 신앙에 바로 서는 소규모 지향적인 교회는 여성적입니다. 그 교회들이 비록 소형이라도 결국 내외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과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들에서 소규모 교회와 공동체를 찾아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그리스도의 성실한 신부입니다.
예레미야 31:22,
[개정]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NIV] How long will you wander, O unfaithful daughter? The LORD will create a new thing on earth--a woman will surround a man."
[KJV] How long wilt thou go about, O thou backsliding daughter? for the LORD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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