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2, “현숙한 여인” אשׁת־חיל

 

몇 년 전, 기도할 때 방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그런 은사를 추구하는 경향도 없고 방언은사를 달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방언이 나왔습니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두 단어가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리가 나오는 대로 영어 알파벳을 적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몰타라는 작은 섬나라의 언어였습니다. 물론 그 뜻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그 나라 정부기관에 문의했습니다. 영어로 이 메일을 보냈습니다. 친절하게도 답장이 왔는데 그 뜻이 성실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그 뜻을 알고 나서 저는 약간 실망을 했습니다. “방언이라면 그래도 뭔가 대단한 뜻이 내포된 것이어야 할 텐데 남자인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라니….”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의미로는 당시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실한 여자 집사님이 필요한 건가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또 방언을 한 것도 잊어버리고 약 3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종철형님네 가족과 저희 가족이 유성 계룡산 수통골에 갔을 때(2011 5 7), 종철형님이 제게 묻기를, 제가 아내와 의견이 다른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대답을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여자들, 드보라와 에스더를 인용했습니다. 제 의견은, 하나님은 남자들이 무력한 비상시에, 지금의 저처럼 남자가 가장 노릇을 잘 못할 때 여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언의 마지막이 현숙한 여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신앙적 격언집인 잠언의 결론으로서 현숙한 여인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에 갑자기 공동체 운동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촛불을 켜놓고 약 2시간 넘게 글을 썼습니다. 그런 글을 쓰면서도 글 내용과는 약간 다른 방향의 영감도 쏟아졌는데 그것으로 룻기의 기본 맥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의 히브리어 원어(에셋 하일, אשׁת־חיל)의 뜻은 여자 용사 혹은 힘센 여자입니다. 싸움을 잘하는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살림을 잘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잠언에 왜 현숙한 여인이 마지막 부분에 놓였는지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했던 단 두 단어의 방언의 의미도 비로소 이해되었습니다. ‘성실한 여자가 바로 현숙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룻기 강해를 했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는 룻기의 의미가 열렸습니다. 룻기는 한 가정의 구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병들어 죽은 전 남편 말론의 이름의 뜻은 병약한 자입니다. 새 남편 보아스는 강한 남자라는 뜻입니다. 병약한 남자의 아내였던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인간의 비정상적인 죄악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결혼함으로 여자가 머리 노릇했던 가정이 남자가 머리가 되는 가정으로 회복합니다.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와 우주의 머리로 회복되는 구속사적 시야를 우리에게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잠언에 현숙한 여인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유는, 잠언의 존재 자체가 진실한 지혜를 구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결국에는 지혜의 근본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대망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숙한 여인, 즉 성실한 여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바탕을 이루어 나갑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사나 여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때는 비상시였습니다. 그들의 등장과 믿음의 행위들이 놀랍고 대단하지만 그 자체가 불완전한 상태를 말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본적인 제도와 어긋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시고 그들에게 남자들을 뛰어넘는 영광과 능력의 기회들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의 지도력으로 상징되는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죄로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의 지도력이나 능력으로 구원이 나타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한 가정사에서부터 세계를 흔들만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성들이 활약하는 일을 통해, 인간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성을 쓰심으로 인간들이 강하다고 착각했던 남성성 즉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게 하셔서 인간 자체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통치자이신 왕중왕,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구원자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와 질서의 개념으로, 그리고 구속사의 개념으로 가정과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을 찾기 바랍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는 그 남편이요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 권세와 권위를 인정하는 신자만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완벽한 남자요 영원한 신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70년대 이후, 성장과 부흥이 한국 교회들의 목표였습니다. 공격적인 부흥회, 전도집회, 무슨 운동, 국내외의 대형 교회 벤치마킹 등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남성적 성향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최종 결과물인 한국의 교회들의 지금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영적 능력과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부정적 요소들이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이런 현상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선택하는 교회의 기준을 목사의 학력과 인지도, 그리고 교회의 건물의 크기와 화려함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외적 수준으로 자신이 평가 받기를 원하는 열등감과 교만함에 빠져있습니다. 대부분 그 신앙환경 속에서 자신들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명목상의 신자로서 출석과 헌금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최면을 걸고 살 것이고, 교회들도 그들이 현재의 물질적 수준을 보장해주는 무언의 약속 속에서 문제점을 묵과하고 같이 병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병이 결국은 교회들에게 재앙을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작은 교회는 문을 닫고, 큰 교회는 힘을 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을 꾀는 이단과 그릇된 가르침들, 특히 다원론적 종교관이 도리어 그러한 영적 공황상태의 틈을 비집고 더 극성일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대안은 의식 있는 소규모 교회와 공동체 운동입니다. 대형화와 성장위주의 교회가 남성적이라면, 말씀에 입각한 신앙에 바로 서는 소규모 지향적인 교회는 여성적입니다. 그 교회들이 비록 소형이라도 결국 내외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과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교회들에서 소규모 교회와 공동체를 찾아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그리스도의 성실한 신부입니다.

 

예레미야 31:22,

[개정]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NIV] How long will you wander, O unfaithful daughter? The LORD will create a new thing on earth--a woman will surround a man."

[KJV] How long wilt thou go about, O thou backsliding daughter? for the LORD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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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S 29, “미리 본 고로


사도행전
2:25~32,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믿는 자와 함께하시겠다고,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이 많이 있습니다.

신명기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신명기 31: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여호수아 1: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시편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말대로 다윗은 십자가형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사고나 사형을 받아 죽지 않고 제 수명을 다 살고 죽은 다윗의 묘를 우리가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러 시편들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시편 43: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시편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그것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언일까요?

우리는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사건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다윗의 시편 16편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시편 16,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성도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시편이 22편입니다.

시편 22,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 시편들이 그저 다윗의 예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다윗은 단순한 예언만이 아니라 실제 자신이 십자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사한 다윗이 경험한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만큼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하면서 또 난해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를 십자가의 거치는 것 혹은 걸림돌(offence)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1,

[개정]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개역]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게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 중에 하신 말씀까지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대해 우리에게 혼란을 줍니다.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말씀은 환상으로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명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성을 들은 제자들까지도 어떤 계기가 없이는 그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에 두 제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해 성경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시고도 모자라 그리스도가 축사하시고 떡을 떼신 때에야 비로소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누가복음 24:25~31,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의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떡이 떼어져 나누어지면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야말로 예수님의 몸이 찢기고 산제사로 드려지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식사 때마다 그렇게 십자가를 예시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 행동의 의미를 훗날에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모든 것이 찢어지고 산산이 부서질 때 십자가가 무엇인지 머리가 아닌 체험으로 알아 가실 것입니다.

만약 과거를 거슬러 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목격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이겠지요? 그러나 2천 년 전, 그 현장은 실제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로마군인? 예수님의 어머니? 그렇습니다. 두 명의 강도들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욕했으며, 그 두 강도들도 욕했습니다. 요즘의 가장 상스러운 욕설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깨닫는, 체험하는 십자가도 그럴 것입니다.

마태복음 27:38~43,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버림받은 느낌이 강할수록 십자가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과거에서 미래를 미리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냥 망원경처럼 환상 속에서 본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의 삶과 경험이 십자가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난의 노래가 십자가를 예언하는 시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다윗과 같은 탄식과 신음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당연히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간구하고 또 은혜와 복을 받기를 기도할 때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시간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우리의 믿음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찾아도 여러분의 절대고독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이 강도들이 여러분을 욕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철학적으로 무인도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을 비유적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영화 ‘Cast Away’ (2000,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 톰 행크스 주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몇 년 전 TV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지루한 내용 때문에 잠간 졸았지만 그 내용이 심각해서 인상 깊이 남은 영화였습니다. 제목 캐스트 어웨이표류자 혹은 버려졌다는 뜻입니다. 영화에 관심 많은 분은 감독과 주연배우만 봐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기억해내실 것입니다.

유명한 택배회사 페덱스의 직원인 주인공이 애인과의 결혼을 앞두고 회사 일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한 후 태평양의 작은 무인도에서 4년 동안 홀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인상 깊은 장면이 두 가지 인데, 주인공이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비행기 잔해에서 찾은 회사 배달품 배구공에 자신이 흘린 피로 얼굴을 그리고 공 상표 이름인 윌슨을 그대로 이름 붙여 마치 사람인양 배구공과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사실은 혼자 말하고, 마치 공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상상해서 들은 체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바다에 떠내려 온 철판을 뗏목처럼 만들어서 무인도를 탈출하게 됩니다. 그 뗏목에 배구공 윌슨도 같이 태웠는데 바다의 폭풍우가 심해져서 그만 바닷물에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때 주인공은 “I‘m sorry”라고 울부짖습니다.

주인공은 마침내 구조되어 세상의 현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나 과거의 주인공의 애인은 자신의 친구와 결혼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을 나와 어떤 곳을 걸어가다가 문득 자신이 황량한 갈림길 사이에 서 있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면은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고독한 주인공의 모습을 멀리서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 영화는 현대인의 고독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상당히 깊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여러분들이 겪는 고독은 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인생은 결국 고독하다는 철학이 아니라, 여러분의 고독은, 버림받음은 터질 것 같은 심장과 몸부림과 죽을 것 같은 처절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집과 주장과 욕망이 무너져갑니다. 인간은 그렇게 해야만 자기를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자아가 죽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가 무엇인지 본, 즉 경험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는 신자 각자의 상황과 사정에 따라 다르게 경험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십자가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의 정도를 십자가를 미리 경험한 다윗의 시편들을 통해 가늠하고 또 위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그 고통이 있기에 주님의 제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1:1~2,6,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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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강도(재난)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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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onicles of Narnia
나니아 연대기라고도 합니다.

전체 7권의 시리즈를 하나로 묶은 영어 원문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영어가 대중적인 문체라면 나니아 시리즈는 대중적이면서도 우아한 문체입니다. 때로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가 나옵니다.

주관적이지만 제가 가장 감동 받은 책은 The Horse and His Boy입니다. 가장 심각한 책은 The Last Battle입니다. 가장 생각을 많이 해 볼 책은 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입니다. 나머지 책들도 재미있습니다.

영화와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이 이 책이 기독교 신앙에 위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북구 신화의 캐릭터와 동물들이 사람처럼 말한다는 이유랍니다. 그런 관점으로 이 책을 보면 그렇게 판단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좀 더 갖고,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하고, 고난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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