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도 중독된다 - 남들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Moving Addicted, to whom making others touched

 

TV, 라디오, 영화, 인터넷, 자기계발서 등에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감동적인 이야기는 라디오방송의 애청자 사연이다. 선택되어 방송이 된 사연을 제공한 청취자에게는 선택되었다는 명예와 함께 선물이 제공이 된다. 그런 당첨과 선물을 노리는 청취자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보내는 이야기들 가운데 당첨의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꾸며낸 감동이야기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SNS에서 좋아요클릭과 칭찬과 격려의 댓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건조하고 논리적인 내용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감동이야기를 많이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어떤 글이나 동영상을 보고 감동했기에 주변에 소개하기 위해 공유하는 정도의 순수한 나눔의 의도였지만, 몇 번 그런 경험이 반복이 되면 더 좋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동영상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감동이야기 중독의 증상이다. 심한 경우는 감동이야기를 자신이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창작물도 있고, 외국의 것을 편집한 것들도 보인다.

 

그런데 설교에 있어서도 꾸며낸 감동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성경 본문은 꾸며낸 이야기가 될 수는 없지만 예화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

 

가짜 예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를 들기 위한 예화인 경우, 이솝 우화나 영화 같은 꾸며낸 이야기를 예화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청중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대부분의 예화는 실화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설교자도 감동적인 예화 찾기에 중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다가 감동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꾸며낸 가짜 예화를 사용하는 실수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Fiorello La Guardia, 1882-1947) 뉴욕 전()시장의 감동적인 재판 이야기이다. 한국의 교회들에서는 그가 뉴욕 시장이 되기 전에 전직 판사라고 과장까지 섞여서 소개가 된다. 어쨌든 그가 빵을 훔친 가난한 노인을 유죄로 판결하면서 10달러 벌금을 물게 하고 그 노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한(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했다는) 시민들도 책임이 있다면서 즉석에서 자신의 모자를 벗어 모금을 하여 그 벌금을 내게 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밝혀진 것이 아닌데 지금도 강단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예화 중의 하나로 사용이 되고 있다.

According to ‘Try and Stop Me’ by Bennett Cerf, La Guardia often officiated in the municipal court. He handled routine misdemeanor cases, including, according to Cerf, that of a woman who had stolen a loaf of bread for her starving family. Cerf states that he insisted on levying a fine of ten dollars, then said "I'm fining everyone in this courtroom fifty cents for living in a city where a person has to steal bread in order to eat!" He passed a hat and gave the fines to the defendant, who left the court with $47.50. There is, however, no convincing proof of this anecdote. http://en.wikipedia.org/wiki/Fiorello_H._La_Guardia

 

The Boiled Frog

 

끓는 물속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즉시 뛰어 나오지만, 개구리를 차가운 물에 넣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그 속에서 죽는다는 유명한 예화도 과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꾸며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개구리는 물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지면 빠져 나온다.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할 예화가 만일 꾸며낸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그 예화를 이용해 전하고자 하는 성경말씀의 교훈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설교자는 예화를 주로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얻기 때문에 그 예화가 꾸며낸 이야기인줄을 본인도 모른다. 설교자 자신이 끓는 물속의 개구리의 전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화를 들은 누군가는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혼자 웃고 마는 것으로 끝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Reformed Preachers Society 09

The Thing More Important Than the Interpretation

성경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

 

성경말씀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설교자는 낙제다. 그의 설교가 교리적으로 틀리지는 않겠지만 교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교리는 설교의 방향과 지침은 될 수 있을지언정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The preacher fails if he makes sense of the Scripture in a doctrinal way. Although his sermons are not wrong, they are not able to jump up the doctrines. The doctrines may be the directions and guidelines but they never make people touched and changed.

 

성경말씀을 휴먼 감동 스토리나 자기계발서로 착각하는 설교자도 낙제다. 영적인 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If he understands the Scripture as moving stories or self development books, he also fails. Because he has no idea about spiritual aspect.

 

성경해석은 설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The interpretation has a very important place in preaching.

 

그러나 대부분의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있어서 100%의 정확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설교자 자신의 성경관과 인생관이 변화하기도 한다. 성경을 대하는 설교자의 영적 수준이 점차 변화하기에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해석도 어떤 일부에서 문제점이나 오류가 발견이 될 수 있다.

However, no preaching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ecise interpretation (Cf. 2Pet. 1:20). Passing time, the preachers are changed in their view points about life and the passages. And changed spiritual standards, also changed their interpretations. Even there might be wrong interpretations in the some works of Augustine and Calvin.

 

그러므로 해석의 옳고 그름은 설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하나님 외에 어느 누가 완벽한 해석을 할 수 있을까?

Therefore it is not absolute to judge between right and wrong in the Bible interpretation. Who is absolutely able to interpret the Bible except God, the true author?

 

올바른 해석은 아닐지라도 본문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와 내용이 좋은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약간의 해석상 오류가 있는 설교라도 용인(사용)하시는 것 같다. 훗날 또 다른 기회를 통해 더 좋은 해석에 이를 수 있도록 설교자를 훈련하고 인도하신다.

You may preach a misinterpreted sermon which has a good intention and contents. In that case it seems that God admits and uses the preaching in His way. He trains and leads the preacher to be better afterward.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조차 그 목적을 갖고 계신다. 해석과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확신하는가?

God even has a good purpose for human error. Importance is for interpretation and insight, and more importance is for which the preacher should be in God's Hand. Are you sure where you are?

Reformed Preachers Society

08. Blow the Trumpet, Break the Pitcher, and Hold the Lamp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건, 그리고 예언은 죄인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준다. 성경에 접근하는 기본은 늘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반대로, 사람이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느냐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성경 해석은 헌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영광을 챙기려는 야망이 내 안에 숨어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다.

Every person, event, and prophecy in the Bible shows God's plan toward the sinned humans. The basis approaching the Bible must always start with this view point. On the contrary, because the hidden desire covered with the mask is deep inside me, the interpretation starting with the view of what humans give something to God comes out.

 

사사기 7장의 본문의 본질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사사 기드온은 그리스도를 표상하며 그가 3백 명의 군사로 미디안군을 무찌르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 구약적인 비유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보지 않으면, 설교자들은 대부분의 다른 설교자처럼 기드온의 3백 명을 싸움에 잘 준비된 태도를 가진 정예병으로 설명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런 해석도 나름대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결론으로 이끌 수는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어떤 자격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We can find the substance of chapter 7 in Judges in this context. The Judge Gideon typifies Christ and the moment beating the Midianites with 300 soldiers is a parable explaining the salvation of Christ in the Old Testament. If we don't follow this view point, we might be misled into the other preachers' sermons that the 300 soldiers are prepared well for the battle. The interpretation may be helpful to the conclusion on their own way for the faith of believers. However, the Bible has never told us some qualities as a condition of the salvation.

 

개처럼 물을 핥거나 무릎 꿇고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사람들의 심리가 전투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군사적인 설명이 가능한가? 3백 명이 물 마시는 행동을 전투를 위한 조심성과 연결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격을 증명하고 싶은 해석에 의한 추측이다. 삼백 명의 행동은 단순히 많은 숫자에서 적은 숫자를 가려내기 위한 독특한 행동일 뿐이다.

Is it possible to explain militarily that the mentality of the people who are going to lap or kneel down at the water has relation with the battle? It is a assumption by the interpretation which hopes for the drinking pose to be proved as a human quality for the salvation. The pose of 300 is merely a unusual way to separate them from the others.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그 3백 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발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준비성과 능력에 하나님의 구원이 달려있지 않다. 구원은 하나님의 행위이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이 구원관에는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The important thing in the passage is that the 300 soldiers are selected by the will of God. The God's salvation is not depend on the human preparations and abilities. The salvation only comes from the action of God not from human.

 

구원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어야 이어지는 전투 장면의 영적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 3백 명이 전투에서 한 일은 무엇인가? 기드온은 그 3백 명이 숫자로도 능력으로도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투 직전까지 여전히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다만 그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이 시킨 일을 그대로 했다는 점이다.

From this conception, we can realize the spiritual meaning of the next battle scene. What did the 300 do for the battle? Gideon had already known that they are not enough strong and numbers for the battle. So he wasn't sure of victory just before the battle. The only best thing he has done was he did as God said.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방법은 영화 ‘300’과 같은 처절하고 용맹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나팔과 빈 항아리와 그 항아리 안에 횃불을 들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팔을 불면서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쳐들고 소리를 질렀을 뿐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고 비유이다.

The only way for the victory wasn't a fierce and brave fight. They just carried the trumpets and lamps lit in the pitchers with their hands. And blowing the trumpets, they broke the pitchers and made the lamps' light show up and cried out some words. Those actions are some symbols and parables that show how God's salvation is going to be fulfilled.

 

기드온의 3백 군사들은 그리스도의 군대다. 그들의 선발 기준은 그들의 능력이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이다. 설교에 유비하자면, 그들은 설교자들이고 목회자들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들의 믿음과 인격이 남들보다 더 좋아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두들겨 맞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The 300 soldiers of Gideon is the army of God. Their selection standard is not their faith or abilities but the exclusive selection of God. Comparing with preaching, they might be called as preachers and pastors. They are not selected for their characters and faith are better than the others'. Now they have lived and beaten as you, and here you are.

 

설교자들은 3백 명처럼 자신들의 손에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들고 있다. 나팔은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상징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는 나의 옛사람이고, 횃불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이시다.

The preachers hold the trumpets, pitches and lamps in their hands like 300. The trumpet typifies God's voice, His words. The pitcher made from earth is my old man and the lamp is the light of the world.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말씀)가 울려 퍼질 때 나의 옛사람은 깨어져 죽는다. 그래야 비로소 내 안의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 그것이 나를 파멸로 이끌 것 같았던 악의 세력을 없애는 방법이고 과정이다. 설교자에게 이런 개인적인 체험이 없다면 설교자 개인도 그렇지만 그가 인도하는 회중들에게 절망과 패배만 가져다 줄 뿐이다(6:6).

When the trumpet of the judgment of God blows, my old man is broken and die. So the light of Christ shows up only after it happened. This is the way and process to destroy the evil power leading me to death. If the preachers don't have this experience, they will let his people as well as himself despaired and lose (Jdg 6:6).

 

나머지 구체적인 적용과 신구약 말씀의 연결은 설교자들과 선발된 영적 삼백 명의 몫이다.

And you, the preachers and the elect are going to have more remained applications and related words in the New and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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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The Portrait of A Preacher

 

화가가 감정을 담아 그린 그림은 그 화가가 그린 앉아있던 사람의 초상화가 아니고 화가 자신의 초상화이다. 그림 속의 앉아있던 사람은 비본질적인 우연일 뿐이다.

“Every portrait that is painted with feeling is a portrait of the artist, not of the sitter. The sitter is merely the accident, the occasion.” - Oscar Wilde, The Picture of Dorian Gray.

 

설교자는 화가다. 그림은 그의 설교다. 그림 속의 모델은 성경 혹은 그리스도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여 한 편의 설교를 그려나간다. 그런데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진정한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설교자 자신을 그리게 된다. 설교자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이단에 대한 말이 아니다.

Preacher is artist. His painting is a preaching. The model on the painting is 'the Bible or Christ'. A preacher is going to paint a piece of sermon modeled on Christ. By the way, when the preacher paints of the true painting of Christ, he becomes to finish to his own portrait. That is not about some heresies talking they are Christ.

 

음악이든지 그림이든지 아니면 문학이든지 모든 예술 작품에는 예술가의 영혼이 녹아있기에 예술이 된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의 모습과 영혼이 투영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초상은 공허한 말장난이다. 만일 설교자가 자신의 지식과 적당히 좋은 문장을 붙이면 하나님의 말씀(설교)을 흉내 낸 모방 작품, 짝퉁 사기(詐欺)는 될 수 있다.

Because the artist's soul is melt in the workpiece, whatever it is, it becomes a work of art. However, the portrait of Christ which doesn't reflect figure and soul of the preacher is empty rhetoric. If a preacher adds his knowledge and pretty good words to his sermon, it would become a copy or a knockoff of the word of God.

 

설교자가 설경 말씀을 경험하는 극적인 순간이 있다. 말씀을 경험하는 그 순간을 영감이라고 한다. 그 말씀의 경험을 계속 거치면서 얻는 설교자의 영혼의 고통이 설교에 녹아들어간다. 그 영감의 간접 경험이 또한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하심과 함께 전달될 때 그것을 예언이라고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하는 일이고 그가 받은 부르심의 최종 목표다.

There are moments preachers experience a rush of the word of the Bible. The moments are called as the Spiritual inspiration. The pain of the preacher's soul passing experiences of the word assimilate into the preaching. It is called the prophecy when the indirect experience of the inspiration is passed to the people who also need it. This is the work of preachers and the ultimate goal of their calling.

 

깨닫지 못하고, 확신이 없고, 영감 받지 못한 설교자의 설교는 그냥 Blah-blah-blah일 뿐이다. 계속 그런 식이라면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솔직히 자신의 형편을 고백하고 설교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목사에게 설교 못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우리 목사님 어찌할꼬! ▶◀

Preachers without awakening, confidence and spiritual inspiration, say blah-bah-blah when they preach. If a preacher keeps his preaching that way, what he needs is stopping preaching or clinging to God. Well, no one tells his preacher no. What shall the preacher then do?



Reformed Preachers Society

 

06. Decrease preaching

 

설교자들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How much time do preachers spend preparing a sermon? (http://thomrainer.com/2013/06/22/how-much-time-do-pastors-spend-preparing-a-sermon/)

1~3 시간: 1%, 4~6 시간: 9%, 7~9 시간: 15%, 10~12 시간: 22%, 13~15 시간: 24%, 16~18 시간: 23%, 19~21 시간: 2%, 22~24 시간: 0%, 25~27 시간: 1%, 28~30 시간: 2%, 31~33 시간: 1%.

 

미국의 목사들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3시간이라는 비공식적인 통계(트위터 투표)가 있다. 물론 미국의 교회들은 한국에서처럼 새벽기도회가 없다. 서구의 개혁교회들은 보통 주일에 1~2회의 예배와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주중 예배가 있다. 그러니 설교 횟수가 많아야 주 3회 이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설교하는 횟수는 10회 이상이 40.2%, 그리고 평균 설교 횟수는 7.5(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159)라고 한다.

 

10회를 만약 13시간씩 준비한다면 130시간(5.4)이 걸린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설교 준비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한국의 목사들은 사실 제대로 된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1. ()을 푼다.

Just talk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2. 다른 설교를 인용하거나 아예 통째로 베낀다.

요즘 표절 문제가 많이 거론 된다. 설교 표절로 목사를 비난하는 진정한 이유는 설교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실은 교인들에게는 권위적이고 세상 영광만을 좋아하는 그 목사의 인격과 행동이 싫은 것이다. 감정적이고 내적인 부분을 공론화하기는 어려우니, 논문 표절이 범죄로 취급되는 사실에 근거하여 내가 비난하기 원하는 목사의 설교를 거론하는 것이다.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42.195km를 자신의 다리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달린다면 사기다. 먼저 앞서 간 선수의 뒤를 갈지라도 노력과 고통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달려야 자신의 기록이 된다.

 

설교자가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이 없이 설교를 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고신대 김대진 교수,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159)

 

설교에 있어서 인용과 짜깁기의 범주를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비록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거의 그대로 사용했더라도 성령의 감동하심과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녹이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설교의 탄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스펄전, 윗필드, 피니, 무디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인용해서 재탄생 시키는 것은 오히려 설교자들이 거쳐야 할 수업 과정이다

 

3. 설교를 줄인다.

담임 목사의 설교 횟수를 줄이고 다른 보조 목회자들이 설교하도록 해야 한다. 목사들이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교인들이 담임 목사의 설교만을 듣기 원하는지 솔직한 답을 물어본 적은 있는지? 그리고 새벽기도회를 예배가 아닌 설교 없는 기도회로 해야 한다. 담임 목사의 설교 횟수만 줄여도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설교 표절 문제는 많이 사라질 것이다


설교자가 위의 셋 중 어느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표절도 어느 정도 가능하고 횟수를 줄일 수도 있지만 제발 첫 번째인 'blah-blah-blah'는 하지 말기를!

"A bishop keeps on saying at the age of eighty what he was told to say when he was a boy of eighteen, and as a natural consequence he always looks absolutely delightful." (Oscar Wilde, The Picture of Dorian 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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