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1. 미완성 복음서

 

마가복음 16:1~20,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제자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까요? 아마도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나 죽은 자도 살렸던 자신의 아들의 능력도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야망이나 꿈이 스승 예수의 죽음으로 다 산산조각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신의 대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신문을 보니 서울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을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좀 덜자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탄생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지만 죽음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살은 죽음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죽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태어난 순서로 가는 것도 아니고 왕후장상의 죽음이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인터넷 검색으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식인 해답에 이렇게 답변한 내용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비슷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곧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에서 무로 변하는 것이죠.

지금껏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할 때 당연히 두려움을 느낍니다.

살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사람들은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고 죽음 너머의 세계가 무언지 생각합니다만 그 후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고.

저 같은 경우는 나의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에

조금은 두렵습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 나의 의식이 사라진다면 저도 두렵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비껴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어느 때 죽을 지도 모르지요.

 

블레이즈 파스칼(1623-1662)17세기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천재였습니다. 그는 수학자요 물리학자이면서 종교사상가였습니다. 그가 16세 때 원추곡선론을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의 확률이론은 세계 수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철학적 단편을 메모로 남겼는데 그가 회심 후에는 그 메모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사상의 고민을 남겨두었습니다. 이런 그의 메모를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팡세입니다.

 

팡세는 그가 젊었을 때 쓴 글이라 창의적이고 날카로운 맛은 있지만 신앙적인 원숙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해 보이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젊은이들이 교양도서로 반드시 읽는 명저입니다.

 

그가 한창 인기 있을 때는 유럽의 사교계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사교파티에 주빈으로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중 타고 가던 마차 바퀴 한 쪽이 세느강 교각에 부딪혀 부러졌습니다. 마차는 크게 부서지고 파스칼은 마차 밑에 깔리게 되었지만 간신히 빠져 나와 살아났습니다.

 

마차에서 빠져 나온 그의 눈앞에는 세느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앞에서 죽음의 코앞까지 갔다 온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영원의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아, 도대체 죽음 앞에서 너는 무엇이냐?”

죽음 앞에서 네가 천재라는 것이 무슨 유익이냐?”

죽음 앞에서 네가 가진 젊음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리고 그날 밤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생의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파스칼이 밤낮 괴로워하며 그의 몸이 수척해 간다는 소식을 들고 수녀인 그의 누나가 찾아와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있다. 그 공허감은 주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는 채울 수 없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3살 때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미완성을 살고 미완성으로 죽습니다.

 

한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의 지평을 만날 때입니다.

 

철학이나 다른 종교들에서도 이 문제를 수 없이 다루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학과 종교들에서는 생과 사의 진정한 이유와 목표를 알게 해주지는 못하고 진실한 진리가 있다는 일반 원리를 알게 하는 그림자와 같은 일을 할 뿐입니다.

 

어떤 계기를 만나서든지 자신이 불완전하고 심각한 죄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의 가치를 처절하게 자기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파스칼이나 바울처럼 죽을 고비 같은 사고를 겪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질병을 겪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하면서 커다란 정신적, 인격적 진통을 만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사건의 공통점은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온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나는 감격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 말씀 외에 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구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은 그 결론 부분이 매우 이상한 복음서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16:9 이하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괄호로 묶여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신 분들은 더욱 놀랄 설명이 붙어있는 것을 충격 받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을 우리는 성경 원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원문을 보고 베낀 것은 사본이라고 부르고, 원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본이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의 원래 저자들이 기록한 원문성경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모두 사본과 번역본을 참고로 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사본이 정확하고 또 남겨진 사본의 수가 많기 때문에 원문의 형태를 추적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6:9~20은 신약 성경에서 사본학적으로가장 논란이 많은 본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두 개의 사본인 시내 사본바티칸 사본’(4세기)에 마가복음 16:9~20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세비우스나 제롬과 같은 저명한 교부들은 16:9~16은 원래 마가가 쓴 내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저스틴이나 터툴리안, 그리고 이레니우스와 같이 유명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16:9~20이 원래부터 마가복음의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과 번역본들에도 16:9~20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사본을 비교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규명하는 학문을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주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인간의 지성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계통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분야입니다.

 

그런 학문의 결과로 기독교가 많은 오해를 받고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정보를 퍼뜨리면서 기독교가 신봉하는 성경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문체를 보아서도 마가의 성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kai(and)가 평균 한 절에 한 번 나타났는데 16:9 이하에서는 평균 2개절에 한 번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첨가되지 않았다고 반박할만한 좋은 증거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이나 목사들도 이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결론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왜 16:9~16이 마가복음에 첨가되었을까요? 10세기에 쓰인 아르메니안 사본은 16:9~20을 사도 요한의 제자가 첨가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자들은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가가 원래부터 16:9~20을 포함한 복음서를 썼지만, 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결론 부분이 손실되거나 없어졌다(또는 삭제되거나 제거되었다).

 

2) 마가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복음서 저작을 완성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3) 마가는 원래부터 16:8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다.

 

그러나 1번 가설은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두루 마리를 말아서 보관했기 때문에, 오히려 끝 부분보다 첫 부분이 더 손실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2번의 가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 지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는 3번의 주장입니다.

 

3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래 마가가 쓴 복음서는 16:8에서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후에 익명의 한 저자가 16:9~20을 첨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저자는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내용을 신약 정경에 포함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6:9~20이 처음에는 제거되었지만, 1세기말에 사도 요한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승인한 후에, 그 제자가 다시 삽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이 옳은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6:9~20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모두 다른 복음서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9~20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른 성경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16:9~11 = 20:11~18

 

2) 두 명의 여행자에게 나타나심

16:12~13 = 24:13~32

 

3) 11제자에게 나타나심

16:14~18 = 28:16~20, 24:36~49, 20:19~23

 

4) 승천 및 사도 선교의 시작

16:19~20 = 24:50~51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마가가 직접 기록한 내용은 아닐 수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른 보조자에 의해 첨가되었고 그 전체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직접 쓴 마지막 8절에 이상한 부분이 또 있습니다. 8절에서 끝날 때 헬라어 단어 gar 로 끝납니다. gar는 영어로 치면 for 로 이해할 수 있고, 우리말로는 왜냐하면혹은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를 문법적으로 접속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8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그들은 무서웠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And they went out quickly, and fled from the sepulchre; for they trembled and were amazed: neither said they any thing to any [man]; for they were afraid.

 

영어성경에서는 for를 앞에 두었습니다. gar를 번역하여 넣으려다 보니 영어성경으로는 그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라는 말이 되고 말았지만 원래는 그냥 그들이 두려워했다. 왜냐하면...’입니다.

 

원칙적으로 접속사란 영어나 우리말처럼 문장 앞에 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접속사가 뒤에 붙어 있습니다. 즉 마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중간에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성경 원문을 보면, 8절이 미완성 문장의 형태로 끝났고, 9절에 어울리지 않는 연결부분이 첨가되어 결국 9절 이하는 첨가된 부분이라는 점이 명확해 집니다.

 

요즘 어떤 영화는, 원래 내용과 결론이 다른 버전을 별도로 만들어서 다른 결말의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일부러 결론을 우리에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자신의 글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만난 사람들의 생애에 어떤 이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러므로라고 마치면서 다음의 행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무슨 이유를 묻습니까? 그리고 어떤 행동을 기대합니까?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마가복음을 마치면서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저는 마가의 스승이며 마가복음의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글을 같이 나누며, 저와 여러분이 베드로나 마가와 같은 십자가 신앙부활의 소망을 따라 주님의 제자로 살기 바라며 마가복음을 마치려합니다.

 

베드로전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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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0. 백부장

 

마가복음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태복음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입니다. 양심과 정직한 판단을 포기한 빌라도는 엉터리 재판 후에 예수님을 처형하도록 군병들에게 넘겨줍니다. 전시도 아닌데 사형 판결이 되자마자 형을 집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16]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그리고 예수님을 넘겨받은 군병들은 아마도 사형수를 모욕 주는 행위가 당시의 관행인지 예수께 갖은 치욕스러운 모욕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습관적으로, 재미삼아 합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흉악한 죄인으로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형의 선고를 받은 다른 두 도적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예수와 함께 처형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포함한 세 사람의 사형수들은 엄청난 무게의 통나무로 만들어진 자신의 사형틀인 십자가를 메고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이미 군병들의 채찍질로 많은 피를 흘렸고 밤샘 심문으로 기진맥진한 예수님에게는 이 십자가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반역자, 도망친 노예, 도적, 살인자 등 중죄인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께서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의 원망도 없이, 제사에 드려지는 말없는 어린 양처럼 이 치욕의 십자가를 받아 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군중심리 조작에 휘말린 예루살렘의 무수한 군중은 예수님을 다른 사형수처럼 악독한 신성 모욕자나 위선자로 착각하고 예수님이 사형장 가는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죄인에게 행하듯 욕설을 퍼붓습니다.

 

예수님은 땀과 피에 젖어서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참으면서 겨우 십자가를 붙들고 너무도 힘겨워하시며 걸어갑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백부장을 비롯한 로마군이 죄수들을 끌고 가고 있고 그 밖으로는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제는 원수를 갚았다고 승리감에 젖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갑니다.

 

이 죽을 자들의 행렬, 그 죽음을 환영하는 행렬이 시내를 지나 성 밖의 골고다의 언덕길로 접어들자 예수님은 기진맥진하여 그만 쓰러집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사람을 찾던 중 그 때 마침 시골에서 돌아오는 시몬을 붙들어 강제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님과 다른 두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달아 올립니다.

 

이제 죽음은 시간문제입니다.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며칠 전(2009.7.24)의 개기일식을 보셨습니까? 61년만의 대단한 일식이라고 하지요? 이 자리의 대부분이 앞으로 남은 생애에 다시 그런 일식을 보기는 힘듭니다.

 

일식이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가운데 껴서 태양이 가려지는 일시적 현상입니다. 요즘은 일식을 아예 관광거리로 삼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일식 구경하는 비행기 좌석이 우리나라 돈으로 2백만 원이나 했는데 인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옛날 과학 지식이 부족할 때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일식을 아주 안 좋은 일의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왕을 의미한다는 사고 때문입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태양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일식 날짜까지 계산할 수 있는 천문지식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식이 일어나면 왕이 근정전에서 소복을 입고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을 치며 태양과 기싸움을 하는 모양새를 보여주어야 했다고 조선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양이 우리 눈에 보일 때는 달의 크기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양의 지름이 139km로 엄청난 크기이지만 그 거리가 지구에서 15천만 km 떨어져있기 때문에 우리 눈에 작게 보이면서, 가까이 있는 달그림자에도 감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우리 지구상에서 볼 때만 달그림자에 가려지는 것처럼 보일뿐이지, 우주 공간에서는 지구 지름의 109배가 넘는 크기의 큰 항성인 태양의 전체 빛이 지구보다 작은 달에 가리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시대는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때입니다. 좁은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사람 눈에는 태양보다도 거대하고 밝은 영원한 진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 착각이 일식 현상과 같이 태양 빛이 우리 눈에서 잠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눈앞의 실리에 달린 문제가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실 지구보다도 더 작은 달 그림자처럼 큰 태양을 가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그 사형 집행을 주관하는 자신의 의무에는 철저했지만 우주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마지막에야 겨우 알아 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백부장입니다.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주동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실제 집행자는 로마 행정부와 군인들이었습니다. 재판장 겸 총책임자는 빌라도였고, 십자가 처형을 지휘한 사람은 로마군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가장 가까이 예수님의 최후를 관찰하고 확인해야 했던 사람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형집행자가 되어야 했고 가장 근접한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백부장이 일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백부장은 로마군의 중간급 장교입니다. 로마의 일 개 보병군단은 약 6,000명의 군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 개 군단은 60개의 백인대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00명의 군사로 이루어진 60개의 백인대가 한 개의 군단이 됩니다.

 

백인대는 로마 군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는 백인대장 혹은 백부장이라고 합니다. 백부장은 일반 사병이 진급해서 올라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들은 당연히 지휘능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도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뽑혔습니다.

 

폴리비우스(Polybius, BC 198~117)라는 로마시대의 그리이스 출신의 역사가가 로마군대의 편제에 대해 남긴 기록 가운데 백부장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은 지휘 능력이 있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믿음직한 사람들로서 과도하게 위험을 따라가는 모험가가 아니다. 그들은 전투에 임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궁지에 빠져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죽기까지 할 사람들이어야 한다.”

The Roman Military System, From The Histories of Polybius published in Vol. III of the Loeb Classical Library edition

http://ancienthistory.about.com/library/bl/bl_text_polybius6.htm

 

개중에는 사병들에게 악독한 백부장들도 있었지만 대개 이렇게 책임감이 강한 모범적인 군인의 표상으로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백부장들을 보면 모두 다 좋은 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를 찾은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도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1~9; 34~4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고, 이 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도 세례 받는 역사적 사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일의 시작이 바로 이방인의 대표로서 로마군의 백부장이라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컬한 사건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같은 백부장은 아닙니다만 백부장 하면 인격적이나 실력으로 사회와 군대에서 존경을 받고 모범이 될 정도의 수준의 사람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주관한 백부장은 그 사형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사형수가 아무리 법적으로 사형 받을 만한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1948년 정부수립 이후 50년 동안 998명이 사형장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형을 집행한 교도관들 혹은 집행자들 그리고 참관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죄수들을 사형 집행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합니다.

 

사형을 집행했을 때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91.12.17에 집행 받은 윤도영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내연녀의 오빠를 죽인 혐의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말다툼을 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때렸고 그가 넘어지며 깨진 항아리에 머리를 찔려 죽었는데 검사가 계획살인으로 몰아 죽게 됐다며 억울해 했습니다. 그래서 국내 처음 국회에서 사형수 특별감형이 상정돼 화제가 됐던 인물입니다.

 

그가 사형장에서 죽기 직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장께 허리를 크게 굽히며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사형집행 신호를 하던 보안과장을 향해서는 미소 지으며 금년에 꼭 진급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뜨끔했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보안과장은 죄책감에 이듬해 옷을 벗었다고 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이라크에 참전한 군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제대한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총을 소지하고 다니거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더라는 신문기사가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과거 전쟁시 로마군의 백부장 비슷한 중대장으로서 북한군을 많이 죽였습니다. 옛날 군대 전설을 들으면 너무 잔인하고 무시무시합니다. 그 이야기를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얘기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다니면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좋은 학교를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직장과 수입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편안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직업 군인이나 경찰, 그리고 공무원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는 않아도 로마시대의 백부장처럼 대부분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의 일을 행하시고 계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적의 목숨을 빼앗아야할 때가 있습니다. 교도관과 경찰 등 사회의 안녕을 위해 사람의 목숨을 다루게 되는 직업인들도 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문명을 지킨 군대의 선봉장이고 공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한 처형 사건이 그의 영혼을 두드렸습니다.

 

이번의 한 죄수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모두들 그를 향해 욕을 하고 심지어 옆의 두 죄수들마저 비난했지만 그 죄수가 죽음을 맞는 모습의 죽음의 직전의 현상은 그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고 더 이상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달그림자가 해를 가렸던 것처럼 그의 눈에서 진리를 가렸던 것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최후를 목격하면서 벗겨졌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사형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양심으로 탄식했습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한 대표자로 그 형을 집행하는 실제 책임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 종교인들 그리고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의 의로움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른척했습니다. 그들의 양심은 해가 가려졌듯이 어두움을 사랑했습니다.

 

백부장은 그들의 대표자 격이었으나 그 혼자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흑암 속에, 죄악 속에 있을지라도 자신의 양심을 여전히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는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하나의 놀라운 은유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별로 큰 죄 될 것 같은 악행을 저지른 적이 없을지라도, 심지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할지라도,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 같은 존경 받는 종교인일지라도 그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다면 악한 죄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 여러 상황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는 예수를 몰랐었다는 그리고 예수를 부인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셨고 이 자리의 여러분은 그 부름에 응답하여 은혜로 구원 받아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아직 구원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백부장처럼 양심적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험난하고 고단한 인생길을 헤맬지라도, 악독하고 미련한 죄악 가운데 행할지라도, 십자가에서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여전히 그 피로 인치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음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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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9. 십자가

 

마가복음 15:1~47,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6]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13]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16]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18]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 (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42]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마가복음 14장과 15장의 흐름을 보면,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십자가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으나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무서워서 도망갑니다.

 

두 번째 그룹은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는 사람들, 즉 제사장 이하 바리새인들과 로마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 세력과 이익에 따라 따로 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파와 연합하고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연합했습니다.

 

이 두 그룹은 두 종류의 결말로 나뉩니다. 배반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십자가로 결정하고 나머지 생을 사는 사람들이 첫 번째 종류입니다. 이들은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또한 이 그룹에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당돌히 요구한(45) 아리마대 요셉과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예수님을 찔렀던 로마군인(19:34)이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백부장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가복음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가복음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니고데모 복음서라는 외경에 의하면, - 외경은 전통적으로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던 로마병사 롱기누스는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순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그룹에 속하는 이 모든 사람들의 대표 선수는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다른 결말로 가는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탐욕을 위해 이 세상을 따라 살다가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다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때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빌라도 같은 사람은 미온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리고 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두 번째 결말의 대표 선수는 유다입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게 됩니다. 같은 시간에 제사장, 장로, 서기관 등 바리새인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의논합니다. 이 상황이 마가복음 1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출신 유다가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원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싹터왔지만 결정적으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일에 대해 유다가 선동한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렸다는데 데에 있었습니다. 유다가 그때까지 원했던, 세상을 뒤바꾸고자 했던 계획과는 예수님이 거리가 너무나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엄청난 능력이 있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에 기대를 했었지만, 마리아가 옥합을 깬 사건을 통해 그가 이 세상의 정치와 돈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을 찾아가서 그를 배신하겠다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 반드시 유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배신으로 그들은 예수라는 세력도 이제 끝이다라는 어떤 징조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기대대로 그 징조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그 대가로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14:11).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합니다. 그 장소가 바로 마가복음을 지은 마가의 다락방, 요즘 식으로 넓은 옥탑 방이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을 맞이하는 기간입니다.

 

본래 유월절은 예수님 당시보다 약 1,50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 받은 날, 열 가지 재앙의 열 번째 재앙으로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가족들의 목숨과 운명을 지켜 준 사건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그리고 만찬 중에 성찬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을 팔 제자가 있다고 밝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배반자가 있을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옹졸한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니고 유다가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만찬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4:30)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도 역시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더욱 쓰라린 후회와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가복음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유다는 계획적이었고 베드로는 우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유다나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떤 결말에 이릅니까? 유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고 마태복음 273절에서 10절까지에만 나옵니다. 그 상황이 오늘 본문 마가복음 15장의 예수님의 재판 장면이 나오는 부분과 같습니다. 성경은 유다도 뉘우쳤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1~5,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베드로도 뉘우쳤습니다. 유다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회개였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악행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제사장 이하 바리새인들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고, 예수님이 무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로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들었는데도 자신의 마음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재판으로 죄수를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총독인 빌라도에게 재판권을 넘겨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형이 불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유대인들의 시기심이 원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이 일으킬 민란이 두려웠고 그 민란으로 로마 중앙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추락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이 무고히 죽는 것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과 지식으로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풀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은 해도 그 소신대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그룹 모두 함께 유다, 베드로, 바리새인들, 그리고 빌라도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양심은 알아도 행동을 그렇게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아마 이 자리의 여러분의 문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이상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튕겨냈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집에서 화분 몇 개에 오이, 딸기, 고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물도 열심히 주었는데 그런데 농사 결과는 오이 하나 나오다가 시들어 말라 죽고, 딸기는 세 알 열렸습니다. 그중 하나만 먹었습니다. 고추는 두어 개 나오다가 말라죽어 갑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흙입니다. 화분의 흙이 그 질이 좋지 않았습니다. 영양분이 없어서 꽃이나 식물이 별로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런 흙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모양은 흙이지만 실제는 돌짝밭,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은 가시밭, 돌짝밭입니다. 우리는 옥토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선을 포장하고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죄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좋은 밭을 만들 수도 없고 생명을 틔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좋은 밭을 우리 안에 만드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보이는 것,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입니다. 세상의 것들 속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지식, 지위, , 물질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반대를 말씀합니다. 세상의 가치에서 떨어지고 끊어지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갖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일이 다 잘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어제도 지하철 타는데 누가 전도지를 줍니다. 내용이 병 고치려면 이곳으로 오라는 겁니다. 아직도 이런 교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심볼이 아닙니다. 장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십자가가 나의 것으로 나의 죽음이 됩니다. 나의 신앙과 삶에서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열매들은 나의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쥐어 터지고 나서 낮아지게 되었을 때, 십자가를 경험하고 내 의가 죽었을 때 싹이 트는 열매들입니다.

 

나는 죄악 덩어리다, 분토다라고 바울과 같은 고백이 문득 터지는 그 날, 자신의 속에 있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육신의 최악의 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되는 경지로 갑니다.

 

그 상황은 여러분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장과 직원 사이에서 체험되어 지는 일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짓죠. 그렇게 나온 시가 51편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죄라고 합니다. 자신이 죄 자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16절 이하에서 갑자기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거룩과 의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시편 40편이 있습니다.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 40:1~7,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마지막 말씀처럼 여러분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발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다윗이 성공하고 위대한 왕이어서, 그래서 그의 노래가 권위 있고 믿을 만하기에 여러분의 감정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한숨과 고통과 고뇌가 진정 나 자신의 것인가를 발견하시느냐 말씀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이고 능력자이기에 자신을 바울의 글 속에 감정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그의 탄식과 양심의 고통을 같이 나누시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웅덩이에서 끌어올려 반석에 세우신다는 말씀은 사람이 못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사람이 만든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구약의 내용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신약에서 반복됩니다.

 

히브리서 10:1~20,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래서 마가복음에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이 특별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31:31~33,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옛 언약으로도, 남편이 되기까지 했어도 그들이 언약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된다는 것은 당시 문화와 사고방식으로 말할 때, 약자에게 외형적인 최고의 보호와 혜택을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룻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룻과의 결혼은 룻의 가정을 구원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그런 보장과 혜택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시는데, 새 언약은 속을 바꾸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법을 우리 속에 두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불같이 기록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직접 밭갈이하고, 흙을 다시 뒤엎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이 마가복음에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14:22~24,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참고.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장면을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은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시거나 그런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를 믿을 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일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교회의 신앙 행태에서, 하나님이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설교들은 진정한 십자가의 신앙을 촉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는 신자들의 헌금과 예배참석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외형적인 열심을 끌어내는 것과 진정한 십자가 신앙의 길로 가는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목사 자신이 영광 받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목사 스스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와 신자의 관계는 선장과 승객의 관계와 같습니다. 선장은 승객의 요구에 항해를 하고 그 항해의 모든 책임은 선장에게 있습니다. 교회의 중요 책임은 목사가 지지만, 목사가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원인은 교인들에게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앙 행태에 대한 모든 원인은 신자와 목사 둘 다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서에서 하나님께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은 사울왕을 세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도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 향한 욕심과 나를 향한 육적 소욕에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제자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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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8. 증거

 

마가복음 14:53~72,

[53]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71]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다보면 특이한 사건의 전개방식으로 본문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는 산헤드린 공회의 개최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안까지 들어가고 정체가 발각되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이 두 번씩 교차하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는 마가가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마가의 스승인 베드로가 자신만이 알던 두렵고도 부끄러운 이 장면을 마가에게 아주 자세히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부인한 죄인이었습니다.

 

53절과 55절에서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들 세 그룹은 산헤드린이라는 공회가 모이는 공식 임원들입니다. 전에는 그들이 모여서 보통 종교적인 문제를 토론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개최 목적이 예수님에 대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내려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죽일만한 정당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라도 만들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십계명까지 스스로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게다가 그들은 정상적인 산헤드린 개최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사장의 집에서, 그것도 한 밤 중에 모이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이는 중간 과정에 54절에 베드로가 그들이 모이는 장소 가까이 다가가는 장면이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베드로는 바로 이곳 제사장의 앞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두 가지 내용이 한 주제를 가지고 휘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용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거짓 증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베드로가 자기를 알아 본 증인을 만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기묘하게도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거를 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문에서는 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를 내어 놓지만 제대로 맞지가 않아서 결국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데 예수님 자신에게 네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증거를 삼겠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너 같은 시골뜨기 목수가 어떻게 감히 그리스도가 되겠느냐는 시기심과 복수심, 그리고 열등감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서는 하녀(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네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보니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의 하나다라고 당당하게 증거를 내어 놓고 있습니다.

 

한 곳에서는 제사장들의 불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증거들이 실패하자 예수님의 말로 트집과 증거를 잡으려 하고 있을 때, 다른 옆에서는 정말 말이 되는 증거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시기심과 원한도 있었지만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가 어떤 분이냐에 대한 성경을 잘못 이해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관은 이렇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이 세상의 현실적인 고통에서, 당시로서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구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구약의 말씀이 시편 2편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4]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군왕들, 권세 잡은 자들을 마치 질그릇 깨뜨리듯이 없애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납작해지고 떱니다. 모든 세계 위에 올라서 지배하는 분으로 이렇게 구약에서는 묘사되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만 예언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같은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이사야 50, 53).

 

같은 시편(22:6~8, 16, 18; 34:20; 69:4, 21절 등)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시는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스가랴 11:13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받은 돈을 나중에 양심의 가책으로 제사장들에게 던져주고 자살하는데 그 시체를 그 은 30개로 산 토기장이의 밭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11:12~13,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정적인 모습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영광이 가득한 승리자여만 했습니다. 그 관점이 오늘날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 앞에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어떻습니까? 예수가 너무 쉽게 잡혔습니다. 마치 기다려준 것처럼. - 사실 예수님이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그리스도는 자신 앞에 붙잡혀 온 힘없는 목수 출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 이런! 기대 이상으로 싱겁게 잡혔습니다. 자기들이 듣기로는 제자 중 하나가 칼질을 했다는데 그것도 잡히는 중에 있던 예수가 만져줘서 정상이 되었다니 기가 막히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절대 그리스도일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까지도 자신의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할리는 없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이미 하나님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도 당시의 메시야관의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까지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아마도 예수님이 썩어빠진 종교계를 뒤엎고 성전제사와 종교제도를 개혁하고 정치계까지 바로잡아 주실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은 안 하고 사방을 몇 사람들과 돌아다니면서 요한의 생각에 딴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오죽했으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6, (CF. 누가복음 7:18~35)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한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 숙원이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분이 전혀 종교개혁에는 관심이 없고 병이나 고치고 다니십니다. 많이 답답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정말 당신이 그리스도이시거든 그리스도답게 왕처럼 다스려 주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다른 증거라도 보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씀이 있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의 금식과 시험을 마치신 후 고향 나사렛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나사렛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시면 요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이적을 능력으로만 보고, 그리스도는 당연히 철장으로 유대와 세계를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일 것이라는 오해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어떻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입니다. 헌금 많이 하고 충성하면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받는다는 오해입니다. 대형 교회와 성공이 복이라는 오해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증거로 방언을 하고 어떤 신비한 이적이 나타나야한다는 괴상한 현상들이 복음이라고 오해하고 그것을 진리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복 받는 신앙이지만 그 복이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습니다. 전혀 이득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신앙의 증거라고 거짓 증거하는 설교자들은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는 거짓 선지자’(마태복음 24:11,24)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개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그 권능만 봅니다. “, 이적을 행하시니 대단하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그것이 아니지요!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고침 받는 이적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었던 이전 상태와 눈을 뜨고 보는 상태의 차이, 평생을 땅바닥을 기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난 그 변화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앉은뱅이가 걷게 되면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각막이식으로 시력을 회복하고 유전자 공학으로 질병을 낫게 하는 변화가 아니죠. 돈으로도 할 수 없는, 세상천지가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병 고침 받는 역사와 이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이적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슨 계급 올라간 것처럼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에 특이한 신유사역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가 있습니다. 일산에 있는 한소망교회(류영모 목사)입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인 류영모 목사님은 영국에서 시작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의 한국 이사장직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시행하던 알파코스 과정 중에 기도하다가 넘어지는현상이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래전 한국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기성 있는 넘어짐도 과거에 있었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회에서 신자의 치아를 치료한 아말감이 금으로 변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한 번이 아니고 또 한 교회에서도 아니고 다른 알파코스 교회에서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지금 대다수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들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큽니다. 이단의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알파코스 교회들에서는 이런 현상들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전, 문제의 핵심인 류영모 목사님은 발표를 통해서 한국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넘어짐현상이나 금이빨 사역을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의 진위는 저 개인으로서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현상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중단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계속 그런 현상에 대한 집착과 유혹에 가까이 하면 언제든지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고, 말씀 위에 선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고,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미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런 현상보다 더 놀라운 일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으로 자신들을 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데에,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매스컴의 관심을 받는데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는 자리까지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몸에 그리스도를 죽게 한 것즉 십자가를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 변화입니다. 천지가 변한 것처럼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법이 변한 것입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나야 신기해하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한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변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진정한 가치는 이렇게 세상의 썩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었는데 왜 저들보다 더 못합니까?”로 하나님께 불평한 적이 있으시지요? 우리가 기도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뭡니까? 좋은 조건을 달라는 겁니다. 조건이 불충분하니까 불편하고 그래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평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은과 금을 우선시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조건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좋은 신앙을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지위, 상태가 목표가 안 됩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조건에 따라 내 신앙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함에도 풍부함에도 모든 일에도’(4:12)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마가복음의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 무서워서 도망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잡히신 곳까지 따라옵니다. 그러나 한 하녀의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죠.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변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평생을 주님과 동행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불과 며칠 전에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인 세력과 그 분위기에 눌려 도망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이 죽인 예수를 전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성전에 들어가던 중 성전 문 앞에 앉아있던 한 걸인과 마주치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앉은뱅이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의 고백인즉, 은과 금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은과 금으로도 살 수 없는, 바로 내게 있어 증거가 되시고 며칠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만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를 갖고 있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이적을 일으킨 첫 번째 대상이 앉은뱅이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오심의 증거가 다시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그 생명을 믿는 바로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가 남긴 서신에서 우리 신자들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3~7,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약속하는 복은 썩는 것들, 이 세상에 속한 것들 입니다. 하늘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와 권능도 하나님이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과 은사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는 능력, 방언, 병 고치는 능력, 쓰러지게 하는 능력, 혀가 쑥 빠지고 이상한 웃음을 웃는 것이 신앙의 표시요 증거라고 생각하면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게 미혹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받은, 그리고 받을 복은 썩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금보다 더 귀한 복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하여 판정할 때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먼저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목사를 봅니다. 그것도 교회의 크기를 보지 않고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나를 보지 않습니다. 볼 능력도 없구요. 그 교회가 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봅니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할 때 또 무엇을 보고 판정합니까? 여러분을 봅니다. 그것도 예수 믿으세요라고 웃으며 전도하고 구제하는 얼굴을 안 보고, 돌아서 가는 여러분의 뒤통수를 보고 판정합니다.

 

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동시에 재판 당했듯이, 사람들은 나 하나를 보고 동시에 나와 하나님 두 가지를 재판합니다. 여러분이 증인이요 살아있는 표적입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마가복음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마가복음 5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가복음 14:32~52,

[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세상 사람들은 때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당당히 죽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예수님도 역시 사람이라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으셨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다보고 계셨던 십자가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죽음이십니다. 겟세마네와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의 고통은 인류의 대표와 둘째 아담으로서 지옥 형벌의 고통을 홀로 담당하신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지옥에 가서 지옥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사람의 인체기관 중 유일하게 뇌와 직접 신경이 연결된 감각기관이라고 합니다. 눈은 마치 뇌의 일부처럼, 뇌가 세상이 궁금하여 밖으로 연결한 장치라는 말입니다. 눈은 빛에 가장 민감합니다. 사람의 감각기관 중에 가장 뛰어나고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피부는 약간은 빛을 느낄 수 있겠지만 눈처럼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은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을 영혼으로 겪으면서도 피부가 빛을 감각할 수 없듯이 그 고통을 제대로 감각할 수 없습니다. 즉 보통 사람은 죽음의 영적 고통을 겉핥기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영적 고통의 무게와 본질까지 체험하신 유일한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영원한 죽음의 속까지 들어가셨고 온 인류의 심판의 무게를 홀로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마라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이유입니다.

 

동산에 계신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룟 유다가 무리와 함께 왔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은 왜 같이 가자고 하십니까? 어디로요? 남들이 가지 않는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 Via Dolorasa 입니다.

 

그 가는 길은 복 받고 치유 받는 길이 아닙니다. 돈 버는 길이 아닙니다. 나의 고통에서 회복하고 나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는 종교적 심리치유도 아닙니다.

 

그 가는 길은, 남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패배고 슬픔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떳떳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 나 자신에 나의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서 모든 것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께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극동방송을 듣다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연세가 그렇게 높은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50대 정도로 카랑카랑하고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설교 내용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더군요.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십일조를 해라.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으로 십일조를 잘해서 거부가 된 록펠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잘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로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파스터 폴 조라면 다 압니다. 나중에는 데이빗으로 개명하셨나요? 그분이 한국 교회 부흥운동, 성령 운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부정적인 영향은 그 이상으로 큽니다. 한 마디로 한국의 신앙을 망쳐놨습니다.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잘하면 내세의 천국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복 받고 잘산다는 신앙이 많은 한국 교인들의 머릿속에 세뇌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그런 면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전하게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앙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노력에 대한 대가를 교회와 신앙을 통해 로또 대박같이 얻으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필 대부분의 십일조 설교가 왜 록펠러입니까? 록펠러라는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십일조 이상의 돈을 헌금했고 말년에 사회사업과 자선사업을 위해 뿌리다시피하며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모두가 그를 나쁘다고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가 말년에 엄청난 돈을 사회에 환원시킨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맹점이지요. 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냉혹하고 무서운 사업가였다는 사실이 그가 뿌린 돈으로 많이 미화되었습니다.

 

록펠러는 아마도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비밀(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9:23)을 늙어 죽기 바로 전에야 깨닫고 실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가 쌓아 온 돈더미의 바닥에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 그에게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업상 문제점과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는 당시 사회적인 논란이 많았습니다. 록펠러 가문의 이런 문제는 그의 아들과 손자 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총기까지 사용했다니 한국의 노동 문제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들에서는 십일조하면 록펠러처럼 복 받는다는 단순 논리로만 비유로 제시하는 일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좋다는 식입니다. 록페러 가문이 엄청나게 헌금해서 성장한 미국의 대형 교회 설교자들의 영향을 한국 교회가 받지 않았겠습니까?

 

왜요?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그것이 한국 교회의 수준이고 현주소입니다. 이제 제발 십일조 이야기에서 록펠러 비유는 한국 교회 강단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제시합니까? 물질 축복, 건강 축복, 대학 합격, 취직 축복이 아니라 십자가에 가서 죽으라는 길입니다. 그곳을 함께 가자라고 하십니다.

 

함께 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배신하여 스승을 적에게 팔 때에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부하들과 로마 군병들을 끌고 왔습니다. 무죄한 자를 폭도와 강도 잡듯이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잡히시기 위해 오히려 마중 가듯 찾아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무력에 순순히 잡히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본 제자들은 놀라고 화가 나고 또 겁도 났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칼을 뽑아 든 자도 있었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 오다가 그것마저 벌고 벌거벗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모두 도망가고 맙니다.

 

사실 주님이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 길은, 당신 자신이 잡히시고 고난당하신 바로 그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 길을 따라갑니다.

 

감람산 겟세마네 언덕에 올라갔던 3명의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순교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순교하고, 요한은 천수를 누리지만 밧모섬에서 인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당시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해서 주님이 같이 가자는 초청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들은 모두 그 길을 같이 갑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는 닭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났다고 합니다. 주님을 부인한 기억이 얼마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면 그랬겠습니까?

 

구약 아가서에도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가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겉으로만 보면 신앙에 대한 말씀도, 역사에 대한 기록도 아닙니다. 노골적인 남녀의 애정 묘사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당당하게 성경에 끼게 되었는지 의심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고 술람미 여인은 그의 백성이며 신부인 신자들을 대신합니다.

 

특히 본문 210절 이하에서는 솔로몬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연약해서 지치고 쓰러진 우리들을 당신의 신부라 칭하시고 또한 도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쉽게 맺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가서에는 시처럼 묘사가 되어있어서 구체적인 사건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들 신랑 신부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신랑 솔로몬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변화만이 아니라, 병이 날 정도로 어려웠던 고난의 시절들이 끝나고 그들의 사랑이 열매 맺게 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때는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자기 앞가림 할 때가 됐고, 은퇴하여 농촌에서 유기농 텃밭을 일구며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돈도 없고, 자녀들도 어리고, 힘들고 여유가 없이 한창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때입니다. 게다가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들이 있을 것입니다.

 

1912412, 세계 최고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첫 항해에서 침몰할 때 일입니다. 이 배의 비극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중에도 유명한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시도어 스트라우스는 독일 태생이었는데 아홉 살 때 가족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민자 가족 출신이기에 미국 땅에 기반이 없던 젊은 시절의 이시도어는 형제와 함께 어느 백화점 한 구석에서 그릇을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났을 때는 열심히 일한 덕분에 미국 최대 백화점의 단독 소유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지만 정계에 진출해서 의원 활동도 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한 미국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네 살 연하의 아내 아이다와 결혼한 지 41년이 되었을 때 스트라우스 부부는, 장성한 아이들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황혼을 즐기기 위해 유럽 여행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19124월 처녀항해를 나선 타이타닉호의 1등 선실에 승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 배는 빙산에 부딪쳐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설마 침몰하겠느냐는 방심으로 구명보트를 승객 수에 맞추어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보트에 타는 비상조치가 취해졌습니다.

 

당연히 스트라우스 부부도 부인만 구명보트에 타고 남편 스트라우스는 점점 바다로 가라앉는 타이타닉호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서 이미 한 쪽 다리를 보트에 걸치고 있던 부인은 갑자기 몸을 돌리며 급히 자신의 하녀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금은보석 장신구들을 다 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녀에게 보트에 타라고 지시하고 혼자 남편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Where you go I go!” -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그리고 두 부부는 서로 껴안고 최후를 마쳤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스트라우스 부인이 남편과 함께 마지막을 같이 하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사랑이야말로, ‘진짜 침몰하지 않는 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분에게 달려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다 내어버린 세상의 금은보화 이상의 것을 천국에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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