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6.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마가복음 14:1~3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2]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이미 양심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개인 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문제와 공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단체라는 이름으로 모이면 욕심을 위해 개인의 양심을 쉽게 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적으로 결집력이 없는 다른 더 큰 집단 즉 국민과 세상을 기만하기도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조선 등 왕국 시대에는 권세 잡은 자들이 더 권세를 누리기 위해 견해와 입장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들을 잔인하게 없애버리는 정변과 사화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룟 유다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혀 양심을 팔아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어떤 시대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하듯, 예수님 시대에도 자신들의 집단의 무궁 권세를 위하여 조금의 반대적인 성향의 어떤 움직임도 말살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미워한 유대교 지배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기반으로 한 제사장과 서기관 계급들은 예수님을 죽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연합전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로마총독부에 압력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1절에,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구원되어 나온 사실을 기념하는 큰 명절이며,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7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름만 다르지 사실 같은 명절입니다. 이 명절의 첫 날 곧 유월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양을 잡는 일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날 밤에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에 발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는 재앙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유월은 여호와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뜻이고 무교는 누룩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유월절은 우리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잡히어 죽으심이 유월절의 때에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자신들의 민족의 역사와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예표의 주인공이 왔는데 그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제도의 가장 상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했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성경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해야 할 자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악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상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할 때에, 먼저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의 명예를 건드린 죄 즉 괘씸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상의 논쟁에서도 예수님께 말 한마디 못했고, 예수님은 사회법으로도 무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없는 일과 증인들을 가짜로 만들어야 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믿지 못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덮어씌우고자 한 것을 볼 때에 자신들은 결국 하나님이 공의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믿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단지 백성들입니다. 2절에,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들은 이렇게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에는 유월절에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누가복음 223절에,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언제 들어갔습니까?

 

요한복음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마가복음에 의하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리자(14:1~9; 26:6~13; 11:54~12:11) 제자들이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항상 어렵게 살림을 유지하던 예수님 일행에게 마리아의 이 행위는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분명히 대부분의 제자들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것을 선동한 자는 유다(12:4~5)였습니다.

 

요한복음 12:4~5,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가난한 자들을 돕고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회운동에 앞 장 서는 일들이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앞 설 수 없습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자 그 뒤를 따라 평생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89세의 강희남 목사가 (2009) 66일 유다처럼 목을 매고 죽었습니다. 그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초대 의장을 지냈고 주한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북한 세습주의를 찬양한 남쪽의 북한 체제 동조자입니다. 그쪽 세력권들의 눈에는 그런 죽음들이 아마 영웅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목사의 탈을 쓴 북한 추종자입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반응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시고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유다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연합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도 사탄이 역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들어간 자는 같은 마귀가 들어간 다른 자들과 연합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입니까? 한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업고 멸시받고 억압받던 자신의 사회적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군림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열망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야로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뜻과 계획이 일치되었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님이 회개의 마지막 기회를 주셨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누가 그 자인지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3:36,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이면 혼비백산하고 그 자리에서 꿇어 엎드리고 죄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진짜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지적당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귀에 잠식당한 자들은 강호순 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전자 이상이나 정신병이 아니라 영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도 유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말리지도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한 길을 갈 때에 하나님은 말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일을 예정하셨으니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이 없을까요? 누가복음 22: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셨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몇 년을 같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그 영 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두려웠고 자신들의 체면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욕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은 30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는 마리아에게는 아마 거의 모든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시집갈 밑천일수도 있고 물려받은 최후의 재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비싼 물건이라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비할 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향유를 허비하듯이 하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을 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되었는데(9)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도 잘 준비하여야 하고 잘 죽어야 합니다.

 

요즘 존엄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배경에 김 할머니(75)라는 분이 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그 할머니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9) 62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기를 제거하였는데 그 순간 그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그 눈물은 무의식 상태에서 조건반사적인 현상으로 나온 것이지 할머니의 감정으로 인한 눈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할머니는 지금까지 호흡기 없이 자연호흡으로 생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과연 존엄성을 갖고 살아왔을까요? 김 할머니의 예는 존엄성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이슈이지 그분의 삶 자체를 평가할 문제도 아니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도덕성에서 우리의 삶이 한 인격체로서 제대로 살아왔느냐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하고 싶습니다.

 

신문기사를 보니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바로 파라 포셋이라는 미국 여배우입니다. 이 여배우의 죽음은 바로 전날의 마이클 잭슨의 전세계를 놀라게 한 죽음과 함께 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62세의 나이에 직장암으로 죽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 사람이 등장한 미녀 삼총사를 열심히 본 기억이 있습니다. ‘6백만불의 사나이의 주인공(리 메이저스)과도 결혼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신문기사에는 젊었을 때의 파라 포셋의 머리칼이 원래 금발이었던 것을 밝은 은청색으로 염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젊었을 때 얻은 명예와 인기의 한 힘이 되었던 그 자랑스러운 머리털을 다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이 사람은 죽기 전에 자신의 머리털이 점점 사라지는 장면들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머리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다라고요.

 

죽음도 잘 죽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삶입니다. 과연 어떤 삶과 죽음이 우리를 더 값지게 합니까?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그 삶과 죽음을 작정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을 통해 자신의 모든 근거를 찾을 때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포가 아니라 그 분의 창조와 심판의 권능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각각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사람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애굽을 나오자마자 앞에 홍해를 두고 뒤에 애굽 군대를 두고 자신들을 쫓아 온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4:10,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만 눈에 보이고 온 세상을 지으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기를 받던 산파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마가복음 14장 이후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며칠 전부터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의 갖가지 반응과 행동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하는 가룟 유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따라 간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두려워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다는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세상 세력과 사람들이 두려워 결국 예수님을 놔두고 도망가거나 부인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시간에 가장 극명하게 보여지는 이 사람들의 행동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혼란과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근거를 이 세상에 두기 때문에 세상의 세력과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신의 부나 재산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도를 두려워하고, 인터넷 클릭수를 두려워하고, 추락하는 증권시세와 부동산가격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일은 안 풀리고 사방이 꽉 막힌 듯이 보이는 듯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편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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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4. 두 렙돈

 

마가복음 12:35~44,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질문 내용

성경 구절

질문자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과 비유로 대답하심

11:27~12:12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세금에 대한 질문

12:13~17

바리새인, 헤롯당

부활에 대한 질문

12:18~27

사두개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12:28~34

서기관

 

마가복음은 십자가로 향하신 주님과 그 십자가를 따라야 할 제자들의 앞길을 위한 제자도를 가르치신 주님의 행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0장까지는 대중들에게 이적 행하심과 가르치심으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중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즉 말씀의 주제가 많이 좁혀졌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당신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아셨고, 유대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자연적으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집중적인 질문과 관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의 행동과 가르치심의 주제가 그들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기시고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격렬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들과의 논쟁을 통해 바로 그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진실입니다. 진실됨이란 양심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입니다.

 

신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인 것은 신앙으로 알겠는데 삶과 행위에 있어서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 자신감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타인과 세상에 불의하지도 불법도 아니라면 사람은 양심의 자유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세상에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세상에 진실하지 못하면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처럼 권세를 잃었을 때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12장의 논쟁들은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의 전쟁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하고 있었고(11:27~28), 예수님도 맞받아치시는데 이승엽이 홈런 치듯 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바리새인들의 따귀가 돌아갈 지경입니다.

 

그리고 12:1~11의 반역하는 농부들의 비유 이야기는 아주 노골적이었습니다. 이에 발끈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그렇다고 그들이 케이오 패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다고 합니다.

 

책잡다라는 뜻이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뜻이지만 예수님에게 객관적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시험한 것입니다.

 

사자와 호랑이를 같이 키우는 사파리에서는 사자와 호랑이는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습성도 모양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같이 힘을 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이 나타날 때입니다.

 

라이거라고 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이 있습니다. 라이거는 보통의 사자나 호랑이보다 체격이 더 크고 힘이 셉니다. 그래서 라이거가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 나타나면 이들은 라이거에게 같이 덤벼든다고 합니다.

 

13절에서는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거의 상종하지 않는 파입니다. 헤롯당은 헤롯왕가를 지지하는 친로마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바리새인과도 이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대교적이고 민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헤롯당과도 연합했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이 반대하던 로마법까지 동원하였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서로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연합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고 악한 감정을 품었는지 이 사실을 보아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 대부분 자신들을 지배하는 로마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금에 대해서 그랬습니다. 심지어 주후 6년에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다라는 민족 운동가가 일어나 로마에 세금 바치는 문제로 반대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금문제는 로마에 반대가 되고 반역이 되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가이사는 로마 황제입니다. 유다가 로마의 속국이니 로마에게 강제적으로 세금을 바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납세가 옳다하면 유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에 반역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매우 현명한 답변으로 그들의 공세를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질문을 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본래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처음부터 잘못 본 것입니다. 천국 시민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육적으로는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더라도 신앙의 자유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세상 권력의 속박이나 의무사항이 있더라도 그 권세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인 만큼 신자들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중요한 내용은 15절에,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예수님이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반대하면서도 헤롯당과 손을 잡았고, 헤롯당도 마찬가지로 만나지도 않는 그들과 연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세금문제를 단지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추악한 이익을 가리기 위해 거짓된 언행을 하는 일입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양심을 속이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2:18~27까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이란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새파에 비해 소수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명기 25:5의 말씀의 내용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나의 예로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은 후에 천국에 갔을 때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과 결혼한 한 여자와의 부부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신명기 25: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2: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즉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영국의 목회자의 75%가 성경은 진리가 아니라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는 오히려 덜 비양심적입니다. 물론 성경을 믿지도 않으면서 목회를 한다는 자체가 양심적이지도 않은 외식자들입니다.

 

지금까지의 질문과 답변의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습니다. 그들의 모략이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질문과 답변을 듣고 있던 한 서기관이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12:28~34)라는 질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성경에 남기신 율법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정한 장로들의 유전같은 전통적인 율법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때로는 그 계명들이 실생활에 서로 상충되는 상황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하는 서기관도 결국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답변에 옳소이다라고 하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첫 번째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 두 번째 세금에 대한 질문, 세 번째 부활에 대한 질문, 그리고 네 번째 최고 계명에 대한 질문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2:41~46)과 누가복음(20:41~44)에서는 예수님이 서기관들에게 질문하신 것으로 나오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질문하는 반문식 질문을 하신 것(12:35)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위기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거꾸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35,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즉 이 말씀은 메시야가 진정으로 다윗의 자손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쳤던 것으로서 그들이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로마의 압제에서 다윗왕의 왕권을 회복하는 다윗의 후손인 구세주입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못하는 서기관들을 대신해 시편 110:1을 근거로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가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렇게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님과 메시야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도덕적, 영적인 이해 부족을 폭로하셨고 예수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의 위선과 외식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시며 신앙의 순수와 진실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분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 38절 이하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침 성전 앞에 있는 연보궤에 어느 여인이 연보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여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갖고 있던 돈의 전부를 연보하였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심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이 여인의 행위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불의와 거짓은 감추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질문을 한 종교 지도자들과 완전히 대조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여인을 하나의 가르침의 본으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은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기도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의 가진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연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두 렙돈을 연보한 그 여인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과부란 당시 사회에서 약자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권세도 없고, 지식도 없고, 재산도 없지만 대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실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위치는 가장 낮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진실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제자의 삶은 무엇인가요?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욕망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헌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과부는 그렇게 연보를 하고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으니 곧 복을 받고 가난한 형편을 면하게 되었을까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바라고, 혹은 어떤 병 고침이나 역사를 바라고 헌금을 하면 대가를 바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은 그냥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가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에 헌금을 하면 목사가 받아서 갖는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를 극렬히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목사가 다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단이나 그 비슷한 종교단체들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반 교회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을 아까워하고 비록 할지라도 체면유지나 미안한 마음에서 부조하는 식입니다.

 

그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종종 헌금봉투에 기도 제목을 적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옳은지는 아직 저도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기도의 조건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기도와 헌금은 별개로 생각하세요.

 

여러분, 헌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과부를 칭찬한 것이 그의 중심을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이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 즉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는 일들이 평범한 것 보다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연쇄 살인범 강호순이 옥중에서 회개하여 예수 믿는 것과 평범한 사람이 예수 믿는 것 중에 어는 것이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될까요? 똑같습니다. 다 같은 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깡패가 회개해서 예수 믿고 몇 년 후에 목사가 되어 짠 나타나서 간증집회 다니면 더 은혜가 되고 뭔가 있을 줄 착각합니다. 절대 아닙니다.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전 개인적으로 연예인 출신이나 범죄자 출신 목회자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달란트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굳이 목사가 되어야 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자신의 인생이 종교적인 변화를 겪을 때 그 변화의 정점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인물로 종교지도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기존의 목사들도 특히 부흥사들이 자신의 세력과 추종자들을 구축하기 위해 좀 특이한 회심자들은 주의 종이 되시오라는 주문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전 두드러기가 나요.

 

1995629,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직후 많은 간증 들어보셨죠. 우리나라의 가장 호화로운 백화점이었습니다. 5층 건물이 부실시공과 건물주의 욕심으로 500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기 직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서 건물 밖으로 나갔더니 곧 바로 건물이 무너졌더라. 그래서 예수 믿게 되거나 아니면 그전까지 신앙이 약했다가 그 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줄 알고 신앙적인 큰 변화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비슷한 간증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부러우셨습니까? ‘, 나도 저런 비슷한 체험을 했으면 더 잘 믿을 텐데...’

 

강호순이 예수 믿는 것과 보통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다르지 않듯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병고침 받고 다시 살거나 기적적으로 어떤 체험을 해서 예수 믿는 것과 그냥 여러분 발로 평범한 가운데 또박또박 걸어서 교회 나오신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극적인 인생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분들은 구원 받을 길이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하나님께 죄짓고 살았기 때문에 범죄자 출신 목사들은 인격적인 문제가 많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는 것도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은혜죠. 진정으로 그런 체험을 하신 분들은 제 말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안되시면 한 번 더!

 

그러나 평범하게 예수 믿고 있는 여러분이 만약 특별한 체험이 더 멋있고 더 화끈하고 더 신앙이 있는 역사로 착각하시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세상적인 가치 있는 것을, 마케팅 가치가 높은 것을 바라고 산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눈여겨보신 가치 있는 과부의 연보는 남들 눈에 뜨이는 많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효험이 있어 보이는 어떤 체험이나 극적 변화가 아닙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그냥 평범한 동전 두 개 일뿐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이 상태에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목숨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가장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여러분 자신을 진심을 담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두 렙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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