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1. 미완성 복음서
마가복음 16:1~20,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제자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 까요? 아마도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나 죽은 자도 살렸던 자신의 아들의 능력도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야망이나 꿈이 스승 예수의 죽음으로 다 산산조각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신의 대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어!’라고 소리치면서 도망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신문을 보니 서울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을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좀 덜자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탄생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지만 죽음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살은 죽음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죽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태어난 순서로 가는 것도 아니고 왕후장상의 죽음이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인터넷 검색으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식인 해답에 이렇게 답변한 내용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비슷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이 곧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에서 무로 변하는 것이죠.
지금껏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할 때 당연히 두려움을 느낍니다.
살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사람들은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고 죽음 너머의 세계가 무언지 생각합니다만 그 후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고.
저 같은 경우는 나의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에
조금은 두렵습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 나의 의식이 사라진다면 저도 두렵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비껴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어느 때 죽을 지도 모르지요.
블레이즈 파스칼(1623-1662)은 17세기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천재였습니다. 그는 수학자요 물리학자이면서 종교사상가였습니다. 그가 16세 때 원추곡선론을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의 확률이론은 세계 수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철학적 단편을 메모로 남겼는데 그가 회심 후에는 그 메모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사상의 고민을 남겨두었습니다. 이런 그의 메모를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 ‘팡세’입니다.
‘팡세’는 그가 젊었을 때 쓴 글이라 창의적이고 날카로운 맛은 있지만 신앙적인 원숙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해 보이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젊은이들이 교양도서로 반드시 읽는 명저입니다.
그가 한창 인기 있을 때는 유럽의 사교계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사교파티에 주빈으로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중 타고 가던 마차 바퀴 한 쪽이 세느강 교각에 부딪혀 부러졌습니다. 마차는 크게 부서지고 파스칼은 마차 밑에 깔리게 되었지만 간신히 빠져 나와 살아났습니다.
마차에서 빠져 나온 그의 눈앞에는 세느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 앞에서 죽음의 코앞까지 갔다 온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영원의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아, 도대체 죽음 앞에서 너는 무엇이냐?”
“죽음 앞에서 네가 천재라는 것이 무슨 유익이냐?”
“죽음 앞에서 네가 가진 젊음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리고 그날 밤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생의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파스칼이 밤낮 괴로워하며 그의 몸이 수척해 간다는 소식을 들고 수녀인 그의 누나가 찾아와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 있다. 그 공허감은 주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는 채울 수 없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23살 때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누구나 미완성을 살고 미완성으로 죽습니다.
한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의 지평을 만날 때입니다.
철학이나 다른 종교들에서도 이 문제를 수 없이 다루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철학과 종교들에서는 생과 사의 진정한 이유와 목표를 알게 해주지는 못하고 진실한 진리가 있다는 ‘일반 원리’를 알게 하는 그림자와 같은 일을 할 뿐입니다.
어떤 계기를 만나서든지 자신이 불완전하고 심각한 죄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의 가치를 처절하게 자기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파스칼이나 바울처럼 죽을 고비 같은 사고를 겪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질병을 겪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하면서 커다란 정신적, 인격적 진통을 만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사건의 공통점은 성경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온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나는 감격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성경 말씀 외에 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구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은 그 결론 부분이 매우 이상한 복음서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16:9 이하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괄호로 묶여있음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주석을 보신 분들은 더욱 놀랄 설명이 붙어있는 것을 충격 받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을 우리는 ‘성경 원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원문을 보고 베낀 것은 ‘사본’이라고 부르고, 원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본’이라고 부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의 원래 저자들이 기록한 ‘원문성경’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모두 사본과 번역본을 참고로 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사본이 정확하고 또 남겨진 사본의 수가 많기 때문에 원문의 형태를 추적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6:9~20은 신약 성경에서 ‘사본학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본문에 속합니다. 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두 개의 사본인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4세기)에 마가복음 16:9~20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세비우스나 제롬과 같은 저명한 교부들은 16:9~16은 원래 마가가 쓴 내용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저스틴이나 터툴리안, 그리고 이레니우스와 같이 유명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16:9~20이 원래부터 마가복음의 본문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본과 번역본들에도 16:9~20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사본을 비교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규명하는 학문을 ‘본문비평’이라고 합니다. 주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인간의 지성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계통의 학자들이 시도하는 분야입니다.
그런 학문의 결과로 기독교가 많은 오해를 받고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즈음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런 정보를 퍼뜨리면서 기독교가 신봉하는 성경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문체를 보아서도 마가의 성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kai(and)가 평균 한 절에 한 번 나타났는데 16:9 이하에서는 평균 2개절에 한 번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첨가되지 않았다고 반박할만한 좋은 증거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많은 보수적인 학자들이나 목사들도 이 부분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결론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왜 16:9~16이 마가복음에 첨가되었을까요? 10세기에 쓰인 아르메니안 사본은 16:9~20을 사도 요한의 제자가 첨가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자들은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가가 원래부터 16:9~20을 포함한 복음서를 썼지만, 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결론 부분이 손실되거나 없어졌다(또는 삭제되거나 제거되었다).
2) 마가가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복음서 저작을 완성하기 전에 죽고 말았다.
3) 마가는 원래부터 16:8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다.
그러나 1번 가설은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두루 마리를 말아서 보관했기 때문에, 오히려 끝 부분보다 첫 부분이 더 손실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2번의 가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 지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는 3번의 주장입니다.
3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래 마가가 쓴 복음서는 16:8에서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한 후에 익명의 한 저자가 16:9~20을 첨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저자는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내용을 신약 정경에 포함시켜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6:9~20이 처음에는 제거되었지만, 1세기말에 사도 요한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승인한 후에, 그 제자가 다시 삽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이 옳은지 우리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6:9~20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모두 다른 복음서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6:9~20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른 성경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막 16:9~11 = 요 20:11~18
2) 두 명의 여행자에게 나타나심
막 16:12~13 = 눅 24:13~32
3) 11제자에게 나타나심
막 16:14~18 = 마 28:16~20, 눅 24:36~49, 요 20:19~23
4) 승천 및 사도 선교의 시작
막 16:19~20 = 눅 24:50~51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마가가 직접 기록한 내용은 아닐 수 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른 보조자에 의해 첨가되었고 그 전체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별 문제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직접 쓴 마지막 8절에 이상한 부분이 또 있습니다. 8절에서 끝날 때 헬라어 단어 gar 로 끝납니다. gar는 영어로 치면 for 로 이해할 수 있고, 우리말로는 ‘왜냐하면’ 혹은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단어를 문법적으로 접속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8절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그들은 무서웠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And they went out quickly, and fled from the sepulchre; for they trembled and were amazed: neither said they any thing to any [man]; for they were afraid.
영어성경에서는 for를 앞에 두었습니다. gar를 번역하여 넣으려다 보니 영어성경으로는 ‘그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에’라는 말이 되고 말았지만 원래는 그냥 ‘그들이 두려워했다. 왜냐하면...’입니다.
원칙적으로 접속사란 영어나 우리말처럼 문장 앞에 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접속사가 뒤에 붙어 있습니다. 즉 마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중간에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성경 원문을 보면, 8절이 미완성 문장의 형태로 끝났고, 9절에 어울리지 않는 연결부분이 첨가되어 결국 9절 이하는 첨가된 부분이라는 점이 명확해 집니다.
요즘 어떤 영화는, 원래 내용과 결론이 다른 버전을 별도로 만들어서 다른 결말의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일부러 결론을 우리에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자신의 글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만난 사람들의 생애에 어떤 이유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러므로”라고 마치면서 다음의 행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무슨 이유를 묻습니까? 그리고 어떤 행동을 기대합니까?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마가복음을 마치면서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저는 마가의 스승이며 마가복음의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글을 같이 나누며, 저와 여러분이 베드로나 마가와 같은 ‘십자가 신앙’과 ‘부활의 소망’을 따라 주님의 제자로 살기 바라며 마가복음을 마치려합니다.
베드로전서 1:1~4,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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